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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 중요한 ‘나’

스펙트럼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고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약 한달 전부터 출퇴근할 때 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원래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운동도 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서 그렇습니다. 운전을 하게 되면 시간이 지루하니 다시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을 라디오처럼 듣게 됩니다. 이전에는 경제·경영이나 자기계발 관련된 주제를 들었다면 요즘은 철학, 심리학, 정신과와 관련된 주제를 찾아서 듣고 있습니다. 이전 칼럼인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기’에서 나이가 들수록 삶은 평범해진다라고 말씀드렸고, 그 평범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철학, 심리학, 정신과에서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나는 어떠한 존재고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동양적인 문화권에 있는 우리나라는 이 ‘나’라는 존재가 귀히 여겨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는 우리나라는 ‘나’보다 ‘우리’를 너무 좋아해서 심지어 아내를 지칭할 때도 ‘우리 와이프’라는 표현을 쓴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our wife’가 되는데 되게 이상한 표현이 되어버린다고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명예교수는 ‘나’라는 존재는 매우 존귀하게 여겨야 하며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주체성이 없으면 그 일은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어하는 일보다는 ‘우리’라는 조직이 해야하는 일을 해야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 보다는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코로나가 창궐하고 ‘우리’가 못 만나게 되면서 ‘나’라는 존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중시해주는 기술이나 콘텐츠가 더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영화 색계에서 주인공 ‘왕치아즈’는 옳다는 믿음으로 조국의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그 이념하에 ‘나’라는 존재를 희생시키는 상황에 빠지고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지면서 ‘우리’가 세웠던 암살이라는 목표를 저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줄거리만으로도 중국에서는 독립운동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상당히 논란이 된 영화입니다. 물론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이념이란 상황에서 ‘개인은 희생되어도 당연한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영화 모던보이에서도 ‘독립이니 친일이니 따져 뭐하겠소?’라는 도발적인 문구를 포스터에 담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식민지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개인의 사랑이란 감정은 뒤로 할 수 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을 던진 영화입니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이념이나 질서가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를 주체적으로 묻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럴려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념이나 질서의 가장자리 경계에 가야합니다. 조던 피터슨이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혼돈과 질서의 경계선에 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강해지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질서에서 안주할 것이 아니라 혼돈과 마주하는 질서의 경계선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최진석 교수 역시 경계에 서있는 사람은 유연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강하다고 합니다. 기존에 있던 개념, 규칙, 학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규칙을 탐구하려면 기존의 이론이나 가설을 증명해주는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연구를 하는 것이 교수인 저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 바람직한 일보다는 재밌는 일, 좋은 일보다는 좋아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전제조건은 자기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 인기를 끈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동백이를 좋아하는 남자 배역이 2명 등장합니다. 여주인공인 동백이는 이혼하고 아들의 친아버지이며 부유한 강종렬보다 동네 파출소 순경이지만 자기를 존귀하게 여겨주는 황용식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저 역시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일이나 사람은 멀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작년에 쓴 글 ‘오랫동안 사유할 수 있는 능력’에서 이러한 집단주의 경향이 성장의 한계를 맞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4차산업혁명과 코로나가 촉발한 새로운 시대에서 앞으로는 ‘우리’보다 ‘나’를 중시하는 사회나 조직이 생존에 우월해지고 있습니다. 백신으로 코로나 사태가 종료되더라도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합니다. ‘우리’도 이제 ‘나’를 중시하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당연해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