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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빛깔무지개 사람들]내 삶이 바로 ‘일곱빛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김종만 치과의원 원장

# 1  형광등을 끈 깜깜한 방에서 은은한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진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그의 옆에는 이제 막 비운 막소주병과 기타음을 따라 돌아가는 녹음기가 있다. 큰 연주회 무대를 앞두고 마지막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 2  조선시대부터 여자교육서로 활용돼온 소혜왕후의 ‘내훈’ 한글필사본을 볼 때마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요, 마음이라”는 말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꿈의 여인상인 소혜왕후를 우러러본다.

 

# 3  12월 5일, 프레스센터. 영화배우 수애 뿐만 아니라 무용, 문학, 미술, 음악, 출판 등 각 예술 분야에서 내로라 하는 이들이 모였다. 각 장르의 평론가들이 모인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이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 및 ‘주목할 예술가’에 대해 시상했다.

치과의사·기타리스트·고서 연구가·음악평론가


 


문화예술계 대표로 ‘한평생’
정통 클래식 수석 연주자와
첫 협연 기타리스트 명성


김종만 원장이 서울대 치의학박물관에 기증한 ‘이 해 박는 집’ 사진. 1920년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67세인 김종만 원장(김종만 치과의원)이 위에 열거한 단편적인 삶의 편린들의 주인공이다. 김 원장의 인생은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제외한다면 크게 기타리스트로서, 고서 연구가로서, 음악 평론가로서의 삶의 궤적을 밟고 있다.


인생의 전반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로서 이름을 날렸고, 후반부에서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을 하는 등 한평생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생을 살고 있다.
김 원장을 기억하는 동대의 지인들은 여전히 그를 세계적인 수준급의 기타리스트로 기억하고 있다(기자에게 소개를 해준 취재원도 역시 그를 기타리스트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김 원장은 “12세에 외삼촌으로부터 이탈리아에서 사온 기타를 선물로 받으면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며 “1960년부터 70년까지(28세까지) 독주, 2중주, 하이든 기타 4중주 D장조 등을 연주하면서 전문적인 기타리스트로서 활동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 등 정통 클래식 수석 연주자들과 함께 협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서 손톱을 기르지 못하면서 전문적인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접게 됐다(당시만 해도 글러브가 귀했다는 것이 김 원장의 설명이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1970년부터 ‘음악생활’에 음악 평론가로 데뷔하면서 객석 등 유명한 음악 잡지에 음악 평론 및 기타와 관련된 내용을 기고해 그의 손을 거쳐간 잡지만 해도 수십개가 넘는다.
현재는 문학, 음악, 연극, 연희, 미술, 영화, 무용 등 7개 분과를 아우르고 있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평론계를 이끌고 있다.


김 원장은 또 고서 연구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현재 한국고서연구회 부회장, 서울대 치의학 박물관 자문위원, 현암 박물관 고문 등을 맡으면서 천주교 고서전시회, 한국치의학 및 의학고서 전시회, 한국여성관계 고성 지상전, 고서자료 전시회 등에도 참석한 바 있다.
김 원장은 “정치적인 함수 때문에 지원을 받던 금액이 끊겨 협의회에서 발행하던 예술평론이 36호로 중단된 상태인데 이를 계속 발간하는 것이 소망”이라며 “정부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박해해서는 안되고 올바른 지원 정책을 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3년 후 고희를 맞을 때 후배들과 함께 요란스럽지 않은 장소에서 저서 봉정식을 하면서 조용히 은퇴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안정미 기자 jmahn@k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