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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빛깔무지개 사람들]치전원 출신 첫 국시 수석 공부는 ‘내가 가야 할 길’/서 희 연

 


서 희 연
서울대 치의학전문대학원생

 

치전원 선입견 불식
더 열심히 해야죠

 

공대 학부시절 ‘자산’
연구 계속하고 싶어

 

치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학생들이 올해 처음으로 배출되면서 치과계의 ‘유전자 지도’가 바뀌고 있다. 지난달 16일 치러진 국시에서 340점 만점에 307.5점(90.4점)을 취득한 서희연 씨(서울대 치의학전문대학원)는 치전원을 졸업한 첫 국시 수석 합격자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국시에서 수석을 했다는 소식을 친구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통해 전해 듣게 됐어요. 저 스스로 무척 놀라웠어요. ‘급 소심하고 덤벙대는 내가 수석을?….’ 떨어지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위로만 받았거든요. 실제로 시험공부하면서 울기도 하구요.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기쁨보다 오히려 주변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서 씨는 81년생으로 서문여고를 졸업하고 2000년에 서울대 응용화학부(현 화학생물공학부)에 입학, 2004년에 졸업하고, 1년여 준비를 거쳐 2005년에 서울대 치전원에 입학해 올해 졸업을 앞두고 있다. 평생 한번 들어가기도 힘든 서울대를 두 번이나 들어간 서 씨는 소위 ‘공부의 신’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밝히는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공부가 제일 쉬운 것은 아니구요 사회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국시를 공부할 때 저만의 스타일을 찾아서 내용을 정리하는 것 위주로 공부를 했어요”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치과계의 원로인 김규문 전 치협 감사가 작은 할아버지(외가쪽)요,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는 임주환 원장(프라임 치과의원)이 고모부라고 하니 치과 가족으로도 소개받을 만하다.
서 씨는 의·치의학전문대학원이 생기면서 공대생들이 이탈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공대 엑소더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 씨는 “주변에서 공대에서 뛰쳐나와서 돈 벌려고 치전원에 다시 들어갔다는 사회적인 편견을 접하기도 했다”며 “단지 돈을 벌려고 치전원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 사람이 다 똑같을 수만은 없으니 일부는 돈 버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동기들을 보더라도 대부분이 돈에 크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서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밝혔다.


서 씨는 또 “공대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마음 놓고 연구에 전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며 “전반적으로 공대에 다니는 친구들, 선·후배들이 걱정하는 것이 불투명한 미래, 안정적이지 못한 미래다. 노력한 만큼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개선이 돼야 공대가 활성화될 수 있다. 도덕적인 면에서만 요구한다면 공대를 외면하는 현상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 씨는 학부 시절에 유체역학을 재미있게 공부했으며, 치전원을 졸업하면서 제출한 논문에서는 학부에서 공부한 것을 기반으로 ‘유변학을 이용한 레진 성질’에 대한 연구를 했다.
서 씨는 “아직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밟으면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다”며 “상황과 기회가 된다면 연구도 계속하고 싶다”고 밝혔다.
아직 사회생활로 인한 때가 묻지 않아 풋풋하고 순수한 모습을 간직한 서 씨가 밝히는 인생에 대한 조언은 그녀의 모습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삶은 고해’라는 화두이다.
신 씨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삶의 지침이 되고 있는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의 일독을 권하면서 삶이 고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좀더 지혜롭게 살 수 있기를 희망했다. 안정미 기자 jmahn@k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