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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정 사비나 수녀] 작음의 힘

종교칼럼 삶

 

홍현정 사비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종교칼럼 ‘삶’ 집필진이 교체됐습니다. 이번호부터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에 소속돼 활동중인 수녀님 4명(홍현정 사비나, 김수영 요한나, 노석순 데레사, 이연희 플로렌스수녀)이 매주 1회씩 원고를 집필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작음의 힘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아침부터 우울해 있었습니다. 그 ‘우울함’에 갇혀서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앞집 담 모서리, 돌벽과 아스팔트 그 사이 한 치 흙에 의지하여 피어있던 작고 여린 풀꽃이 눈에 들어온 것을 보면요. 깨알만큼 작지만 의젓하게 다섯 개 꽃잎을 다 갖추고, 태양을 향해 당당하게 핀... 그 꽃 이름이 무엇인지, 이름이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머나!” 탄성과 함께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가느다란 가지들에 연보라빛 꽃들이 사뿐히 올라앉아 제풀에 흔들거리는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 보노라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이토록 작은 것이 이토록 완전하다는 감탄과 함께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 이토록 연약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비슷한 감정을 갓 태어난 조카의 다섯 발가락 다섯 손가락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차마 만지지도 못한 채 그냥 바라보고, 놀라워하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일어섰을 때, ‘우울함’에 갇혀 있던 제 앞에 다시 세상이 열린 것을 깨닫습니다.
한 치 흙에서 자라난 것은 그 꽃만이 아니었습니다. 민들레도, 토끼풀도 그 옆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위에서는 담쟁이가 억척같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참, 조화로운 세상입니다. “수녀님, 참 좋지요?” 비로소 함께 오던 수녀님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완전하면서도 연약한, 무력하면서도 강인한… 이러한 상반된 속성들이 미묘하게 섞여있는 것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신비를 느낍니다. 우리를 매혹하고, 그래서 자신에게서 나와 더 큰 세계로 개방시켜주는 아름다움은 어떤 의미로 늘 “두렵고도 떨리는”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게 해줍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보다는 한 두 군데 구멍이 있는 사람 앞에서 편안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리일까요? 확실한 것은 고통과 어려움을 체험해본 사람만이 다른 이의 그것을 위로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축구선수 차두리씨도 “아버지도 실패를 아는 분이니 다른 말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우루과이 전에서 패배한 후 말했다더군요.


약함, 실패, 무력함, 작음… 오늘날 경쟁적인 소비사회에서 마치 ‘악’인양 치부되고, 그래서 누구도 내 것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요소들입니다. 조금만 정직하면 절대로 없앨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부분임을, 더 나아 우리 삶에 더 깊은 의미와 맛을 주는 것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요.
풀꽃이 저를 일깨우던 날,  저의 시선은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십중팔구, 얄팍한 제 자존심이 상할 일이 있었거나, 그게 아니면 하루의 잔 걱정거리에 사로잡혀 있었겠지요. 그렇게 갇혀 있던 저를 일깨운 것은 작고 연약한 풀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리라 불평하거나, 보잘 것 없는 풀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하지도 않고 자유롭게 피어난 그 풀꽃이 어두운 데서 나오라 저를 초대했습니다.


약함이 아름다움을 전혀 방해하지 못한다고, 아니 오히려 그 심오한 아름다움의 일부라고 저를 가르쳤습니다. 작음이 존재를 피워내는데 장애가 아니라고, 아니 오히려 그 끈질긴 용기의 원천이라고 그렇게 저를 격려했습니다. 작음과 실패와 약함을 대하는 태도에 참된 성장의 가능성이 있다고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날 저녁기도 때는 밝음만이 아닌, 성공만이 아닌, 강함과 승리와 큰 것만이 아닌, 그 반대의 가치를 바라보고, 놀라워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런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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