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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요한나 수녀]뿌리의 삶

종|교|칼|럼| 삶

 

뿌리의 삶

 

김수영 요한나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수녀회에 처음 입회하게 되면 3~4년간은 수도원 밖을 나가지 않고 수도원 안에서 수도생활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도생활을 배우고 집안일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입회후 2년 정도 지나면 수도복을 입는 착복 예식을 통해 수련기가 시작되는데 이 시기는 오로지 수도원 안에서 세속 생활을 잊고 하느님과의 생활만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처음 입은 수도복이 어색하고, 바깥 생활과는 많이 다른 수도 생활이 낯설어 실수가 연발입니다.


지금은 여든이 넘으신 한 할머니 수녀님, 젊은 시절에는 병원 약사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셨는데 그 후로도 바느질, 묵주 만들기, 농사일 등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겨울에 김장 담글 배추, 무, 고추 농사 또 호박, 당근 등 수녀원의 노는 땅들에 심은 농사는 수련자들의 도움으로 매년 해내셨지요. 일본 식민지 시대 때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 말을 배우고 자라신 우리 할머니 수녀님의 발음은 같은 경상도 사람도 해석해 내기 어려운 지라 안 그래도 실수가 많은 수련자들, 수녀님의 호통 소리에 우왕좌왕하다가 실수가 연발, 야단도 연발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 도시에서만 살다가 밭농사라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수련자들이 일을 벌였습니다. 할머니 수녀님께서 고추에 벌레가 있는 것을 보시고 벌레를 잡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은 수련자들이 나무젓가락을 가져다가 열심히 벌레를 잡다가 고추의 뿌리까지 뽑아 거기에 있는 벌레까지 잡았더랬습니다. 고추가 잘 자라고 있는 때라면 얼마나 더운 시절이었는지 짐작하시겠지요. 한낮 땡볕을 본 고추 뿌리는 다시 잘 심겨졌지만서도 시들시들, 나중에 검사하러 오신 수녀님은 ‘고추가 왜 이 모양이나?’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고 상황을 알게 되신 수녀님은 어쩜 이리도 모를 수 있나 하면서 수련자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한해 고추 농사를 망친 그 심정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할 수 없이 경리 수녀님이 시장에 가서 새 고추 모종을 사와서 수녀님을 달래드린 다음에야 마음을 푸셔서 수련자들이 집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머리로 아는 것은 많아도 실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은 적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강원도 정선에 사는데 이 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산이 높고 나무도 높고 바위도 아름다워 小금강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한낮에는 매우 덥지만 공기가 맑고 나무가 많아 그런지 나무 그늘 밑은 시원해서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이렇게 나무 그늘 밑에서 쉬면서 ‘뿌리가 나무에게’ 라는 시의 한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갖가지 고마운 것들을 선사하는 나무들에 대해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전략)...네가 줄기로 솟아 봄날 푸른 잎을 낼 때 / 나는 여전히 아래로 / 더욱 아래로 막힌 어둠을 더듬었다/ 어느 날 네가 사나운 비바람 맞으며 /가지가 찢어지고 뒤틀려 신음할 때 / 나는 너를 위하여 오직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었으나 / 나는 믿었다 /내가 이 어둠을 온 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는 한 / 너는 쓰러지지 않으리라고...(후략)


나무는 우리에게 맑은 공기를, 시원한 그늘을,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고마운 존재인데 그 뿌리는 그런 모든 것을 맺어 주기 위해 어둠 속에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참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뿌리가 드러나게 되면 그 나무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흙 속에 있어야 제 생명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야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을요. 뿌리가 광명에로 나오게 되면 얼마 안가 그 생명은 시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이런 뿌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았고 그분들의 수고와 피땀이라는 거름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분들은 또 할머니, 할아버지께 생명을 받았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또 그 부모님께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뿌리의 역할을 해 주시는 조상들 덕분에 우리는 세상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도 이제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우리가 받은 생명을 나누어 주는 뿌리의 삶으로 초대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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