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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정직함

종|교|칼|럼| 삶


텃밭의 정직함

 

이른 봄에 거름을 넣어 텃밭을 일구었습니다. 수녀원 뒤에 자리한 뒷동산에서 부엽토를 끌어다가 음식물 찌꺼기와 골고루 섞은 다음 미생물로 발효를 시킨 거름도 넣었습니다. 조개껍질을 잘게 부수고, 한 길에 있는 한약방에 가서 약재를 다린 찌꺼기도 얻어다 섞었습니다. 돌맹이를 골라내고 삽질을 시작했습니다. 익숙한 일은 아니지만, 도와주는 이가 여럿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봄 햇살 아래에서 고랑을 깊게 파고 이랑을 반듯하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하는 이들과의 웃음,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리고 정성을 넣었습니다.


씨앗을 심기 위해 고랑을 줄 세우고 씨앗을 뿌린 뒤 고운 흙으로 골고루 덮었습니다. 씨앗마다 간격이 달랐고, 어떤 것은 모종을 사와 심었습니다. 혹시 장갑을 낀 손이 둔해 모종을 다치게 할까봐 맨 손으로 옮겨 심었지요. 모종을 만지고 흙을 만질 때,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편안함은 바쁜 일상에서 오는 가쁜 숨을 고르게 해 주었고, 머리가 맑아져 활기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제게 주는 생명력이 기뻤습니다. 


오이, 가지, 호박, 고추, 고구마, 토마토, 상추, 쑥갓, 아욱, 양상추… 떡잎을 따주고, 지지대를 세워 주었습니다. 매일 물을 주었고, 흙을 돋우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자라지 않아 조바심이 났습니다. 고집을 부리거나 토라져 있는 것처럼 몇 주가 지나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거름을 주었고 벌레도 잡았습니다. 뿌리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기다려 주어야하는 기본을 생각하지 않고, 빨리 많은 수확을 기대하는 제 자신의 마음엔 욕심이 생겼습니다.


벌레가 다 먹어버려 죽어가는 열무를 뽑아내고 다시 시금치 씨앗을 뿌리며 식물의 정직함을 봅니다. 뿌린 것 보다 더 많은 결과를 바랬던 저를 부끄럽게 한 것은 텃밭에 뿌리를 내린 채소들입니다. 조건이 맞으면 자라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열매 맺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키우고 돌보는 이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필요를 채우고 남은 것은 다시 자신을 있게 한 땅으로 되돌려줍니다. 뿌린 그 자리에서 나고 피어나고 열매 맺고 내어줍니다. 동물처럼 다른 어떤 것을 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이 되어 주는 요소를 많이 지녔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배움입니다.


수녀원 뒷동산에는 작년부터 고라니가 살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기 고라니로 작년부터 옆에 있는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다가 주변공사로 엄마와 헤어진 이 아기 고라니는 현재, 주변에서 담을 쌓고 길을 만들었기에 완전히 고립된 상태입니다. 어미와 만날 수 있게 동물 보호소에 연락도 하고 우리가 잡아서 옆 산으로 옮겨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함께 살아오고 있습니다.


먹이가 없는 겨울에는 과일껍질과 야채 찌꺼기를 주었는데 봄이 되고는 새순을 먹고 있기에 다행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어느 날 부터는 산에서 내려와 호박 모종을 먹더니 지금은 예쁘게 자란 콩잎과 고추 그리고 고구마 줄기를 먹은 것이 발각되어 비상이 걸렸습니다. 조금은 괜찮지만, 피해가 날로 늘어나고 고라니는 점점 과감해지니 제 마음 안에서는 화도 나고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조급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보존하고픈 마음에 야채 밭 주위로 그물망을 치고 산에서 넘어오지 말라 주간계선을 높이 올렸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불편한 마음이 생깁니다. 제 자신을 바라보니, 고라니에게 빼앗긴 야채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서 부터 이미 소유해 버린 나의 영역에 대한 침범 때문이었습니다.


야채 안에 담긴 나의 정성, 수고, 희생을 내려 놓지 못한 욕심스런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고라니를 텃밭에서 몰아내기 전에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고 있고 내 마음 안에 침범하여 살고 있는 고라니를 몰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텃밭 야채에 담은 나의 정성과 수고는 키우는 기쁨으로 이미 넘치도록 받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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