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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홍현정 사비나 수녀] 약함의 힘

약함의 힘


함께 사는 젊은 수녀님들의 부모님들을 공동체에 초대했습니다. 수녀님들이 젊다는 것은 그 부모님들도 사랑하는 딸들을 떠나보낸 지 3~4년 된, 아직은 이별에 아파하는 분들이라는 말이지요. 사실 수녀원에서 한나절을 함께 지내자고 초대한 것도 그 아픔을 좀 달래드리려는 의도였고요. 아버님 두 분이 ‘배신자’를 듀엣으로 부르셨는데, “배신자여, 배신자여, 사랑의 배신자여-”라는 부분에 이르는 순간 약속이나 한듯 두 딸들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닙니까! 실컷 웃었지만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저희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왕’과 같았습니다. 집안의 모든 결정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엄마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두 그 명령에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추석, 성묘를 다녀오던 아버지가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그냥 지나치던 택시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던 거지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아버지의 그 ‘큰 목소리’를 지탱한 것은 늘 조용하고 순종적이던 엄마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에서 ‘슬픔에 못 이기는 한 사람’으로 내려선 아버지를 보면서 사춘기 소녀는 다정한 엄마와 힘센 아버지를 함께 잃은 듯 슬펐습니다.

수녀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후 한 달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저를 불러 입회준비를 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으시더군요. 이후 4년 쯤 후에야 “아무리 아버지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때 저를 말리지 못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당신 한계를 보시고, 제 판단과 저의 신념을 존중해 주신 것이지요. 비록 딸이 선택한 길을 채 이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점점 더 약한 분이 되어 가셨습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를 하셔서 하소연을 하시더군요. “네 큰 언니는 이래서 걱정이고, 둘째 언니는 저래서 마음이 괴롭고... (긴 한숨) ... 그래도 네가 제일 낫다.” 일상 삶의 어려움에 당면해야 하는 언니들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기억하기에, 이때부터 아버지는 저를, 저의 길을, 제 길을 허락해주신 당신을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제가 행복하다는 것으로 충분하셨기 때문이었겠지요.


 지금 아버지는 87세이십니다. 얼마 전 찾아뵌 아버지는 등이 꾸부정 굽고 고개를 약간 숙인, 전형적인 할아버지 모습이셨습니다. 더위에 입맛을 잃어 더욱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딸이 사무실에서 ‘행복 메이커’라는 말을 듣는대요!” 언니에게서 들은 말을 이렇게 전해드리자 제가 보는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천히 등이 펴지고, 살이 빠진 고개에 힘이 들어가면서 미소가 피어난 아버지의 모습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아닙니까! 문득 아버지의 일생이 예수님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이 굳이 한계 많은 인간이 되시고, 당신 생명까지 남의 처분에 맡기셨던 2000년 전의 그 일이 아버지의 삶에서 재현되는 것 같았습니다. 왕에서, 인간으로, 딸의 ‘배신’도 받아들이고, 이제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당신의 기쁨조차 자식의 삶에 의존하는… 그런데, 바로 거기서 저와 언니들의,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의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피어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딸들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애쓰시는 부모님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더 많이 사랑해서 더 약해지는 법, 다른 이를 위하여 스스로 약해지기를 선택하면서 세상에 생명을 자라게 하는 법을 묵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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