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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廉恥) 알기

월요시론

수일 전 치과의사들의 어느 회의에서 “염치를 아시오”라는 호통을 들었다. 아마도 특정 사안과 관련해 교직에 있는 치과의사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염치(廉恥)란 말은 “뜻이 맑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풀이됨을 생각하면 교직에서의 치과의사 삶의 궤적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치한 것으로 투영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사안과는 별개로 교직자로서의 치과의사가 어떤 행적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치과의사 전문직으로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개원의, 종합병원 봉직의, 교직, 연구직, 국공립기관 등 다양하다. 직장을 선택함에 있어서 우리는 온전히 자유의사에 의해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게 되지만 어떠한 결정이든 선택의 자유에는 자신의 직역에 대한 책임과 윤리적 지침, 그리고 자신의 직역 외 다른 영역이 줄 수 있는 잠재적 이득과 기회비용의 유보와 같은 명확한 범위를 스스로 경계 짓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선택이란 최선과 최악의 경계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한다는 의미보다는 선택 영역의 각 꼭지가 각기 타협될 수 없는 특징과 장점을 가질 때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다른 한 꼭지의 유보를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보한 다른 한 쪽에 마음을 둔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기망하는 일일 뿐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한 상대방에게도 불편을 줄 수 있다.

‘Doctor’라는 단어가 의사라는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 후 1300년경 전후로 추정되며 이는 ‘Teacher’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Docere’와 같은 어원을 가짐을 생각하면 치과의사를 포함한 의사 직역은 직간접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과 관련을 가지는 직무상의 특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치과의사로서 교직은 ‘Doctor’와 ‘Teacher’가 가지는 직업상의 특징을 모두 가짐으로써 제한된 의미에서의 기회비용의 유보를 의미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직만이 주는 즐거움도 있다. 종종 페이스북에 올라온 동료들의 우아한 클리닉, 여행담, 취미생활, 식도락, 자동차 등의 사진에서 부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캄캄한 새벽부터 시작되는 컨퍼런스에서 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온갖 꼼수를 다 부리고, 5분 단위로 채워진 환자 약속표 앞에서 한숨짓기도 하고, 웃는 모습으로 환자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면서 정작 나는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전화기 문자메뉴는 늘 밀린 학사 서류 독촉으로 가득 차 있고, 어쩌다 천신만고 끝에 기고한 논문이 거절되는 수모를 자주 맛보는 고달픈 형편을 개원한 동료들이 어떤 면에서는 부러워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랍기 까지 하다.

그래서 교직자의 염치는 헛된 재물을 따르느라 학문과 인술의 본질을 흐리거나, 얕은 재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현혹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때 필요한 자기 성찰이다. 교직의 본질은 정보와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의 생산은 연구를 통해 만들어질 것이고, 이를 유통하는 일이 교육이라고 풀이된다. 연구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며 바로 이 호기심이 연구자를 밤늦게 학교에 붙들어 두는 동력이다. 그렇게 수 십 년 진료실과 연구실에서 지낸 시간이 강의라는 이름으로 동료와 후학들에게 전달될 때 우리는 염치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얄팍한 몇 개의 연구결과를 프레젠테이션 기술로 포장하고 외국 학회에서 어깨 너머로 얻어들은 몇 마디 단어의 끈으로 묶어 부끄럼 없이 동료들 앞에 서서 떠들어댔던 부끄러움을 새삼 떠올리게 되어 ‘염치를 아시오’라는 질책이 회초리처럼 가슴을 내리친다.

박영국 경희대치전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