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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만화방

Relay Essay-제1986번째

나의 고향은 대단한 시골이다.
누군가가 그 곳을 ‘깡촌’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순간 발끈하겠지만 반박할 지혜는 없다.

지금에 비한다면 그래도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절의 내 고향은 꽤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5일마다 돌아오던 장날이면 서로 먼저 버스에 타려고 악을 쓰시던 할머니들과 고함치던 버스 기사 아저씨…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항상 그 버스 정류장을 지나 옆마을에 있던 학교로 통학했다. 그나마 나는 통학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14명이었던 우리 반 친구들은 4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다니거나, 누군가가 태워주는 자전거의 뒷자리를 빌려 학교를 다녔다. 요즘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누구네 집에 놀러가고 함께 누워서 숙제하고…그런 즐거움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든 환경이었다.

그렇게 심심하게(?) 국민학교 고학년생이 된 나의 유일한 설렘은 읍내의 중학교에 다니던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리 집 툇마루에서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를 바라보면 산모퉁이 사이의 찻길이 보였는데, 빨간 버스의 뒷꽁무니가 보이기 무섭게 신발을 후다닥 신고 언니를 마중가곤 했다. 밭일을 하시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의아한 눈길을 보낼 정도로 후다닥 달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때마침 버스에서 내린 언니가 웃으면서 가방을 넘겨주었다. 그랬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언니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언니의 무거운 책가방을 기다린 거였다. 언니의 가방에는 꽤 자주 만화책이 들어있었다.

집에 있던 세계명작전집이 시들해져 갈 무렵, 이렇게 언니를 통해 만나게 된 만화책의 세계는 특별했다. 2박 3일이었나? 대여기간을 지키기 위해 10권짜리 만화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또다시 읽고,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메모지에 적어놓기까지 하고 또 찾아 읽었다. 언니와 나는 만화책을 읽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책상의 위치도 바꾸고 교과서 사이에 끼워서 읽기도 하고 일부러 방문에 기대고 앉아 우리의 은밀한 독서를 방해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몇 년 후, 중학생이 된 나는 더욱 본격적으로 만화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중학교에 가려면 언니가 타고 다니던 빨간 버스를 타고 15분쯤 가야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항상 만화책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학교에 가면 교실 뒤의 사물함에 만화책을 숨겨두고 쉬는 시간에 몰래 꺼내서 읽고, 수업이 끝나면 만화방에 가서 반납하고 다시 빌리곤 했다. 내가 즐겨 찾던 읍내의 만화방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도회지에서는 만화방이 불량한(?) 학생들이 어슬렁거리는 장소였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읍내의 만화방은 나 같은 평범한 중고등학교 여자애들이 교복차림을 하고 하하호호 놀던 곳이 었다. 만화방은 온통 책장이었고, 그 책장은 온전히 만화책 차지였다. 덕분에 신간이 나오는 날이면 만화방 아주머니는 신간을 꽂을 장소를 찾느라 늘 고심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들은 귀신같이 아주머니께 ‘저기 빈칸이 있어요’라고 알려드리곤 했다. 학교에서나 하굣길에서나 내 주변에는 언제나 만화책을 좋아하던 친구들로 북적였다. 도저히 손에 닿지 않는 맨꼭대기 칸에 놓여있던 만화책을 보려고 운동화를 벗고 의자에 올라갈 때면 위태위태하던 의자를 꼭 잡아주던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마치고, 나는 도회지에 있는 여고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하숙을 했는데 주말에는 항상 집으로 돌아와 읍내에 있는 만화방에 갔다. 당연히 고등학교 근처에도 만화대여점이 몇 군데 있었지만, 나는 왠지 익숙한 우리 읍내의 만화방이 더 좋았다. 아직 완결을 보지 못한 수많은 만화시리즈가 있는데… 새로운 만화대여점에 가면 내가 읽어야 할 만화책들을 한권이라도 놓칠까봐 조바심이 났던 것일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읍내의 만화방에 변화가 생겼다. 인구가 많이 줄어 경영에 어려움을 느껴오던 주인아저씨 내외는 만화방을 반으로 뚝 잘라 한쪽에 피씨방을 오픈하셨다. 나로선 약간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내 고향은 인구 노화가 심각해 읍내의 가게를 접고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도 한 학년에 겨우 세 반을 유지하기가 벅찼다. 만화방의 절반이 피씨방으로 바뀌면서 주인아주머니는 늘 담배연기에 기침을 콜록거리셨다. 나도 더 이상 만화방 안에서는 만화를 읽지 않았다. 늘 만화책을 빌려서 집에서만 읽게 되었다. 덩달아 죽치고 앉아있을 때면 마주치곤 했던 중학교 친구들도 점차 만나기 힘들어졌다.

그러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 더더욱 멀리 유학을 가게 되었다. 마침 본가도 이사를 하게 되어 나의 고향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남게 되셨다. 그 이후로는 추석, 설날을 포함에 1년에 겨우 3~4번 정도 고향을 찾게 되었다. 비록 1년에 서너 번 뿐 이었지만, 고향을 방문하는 때면 나는 항상 그 만화방을 찾았다. 내가 만화방에 갈 때면, 부쩍 흰머리가 많아지신 주인 아주머니께서 ‘왜 이렇게 안 왔어, 시집갔다 친정 온거야?’ 라는 말씀을 꽤 자주 하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주인아저씨의 모습은 뵐 수가 없었다. 어느덧 도시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도저히 아저씨의 안부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1년에 서너 번 찾은 만화방은 어릴 적 내가 즐겨 찾던 만화방과는 상당히 다른 곳이었다.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써도 뭔가의 기억이 툭툭 끊겨 버리는 느낌… 내가 이걸 읽었던가, 몇 권까지 읽었더라….
 
그리고 정확히 2013년 추석이었으리라. 고향을 방문했다가 인근에 살던 숙모로부터 만화방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에 들었다면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겠지만, 나는 의외로 ‘아, 그래요?’하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때도 만화책을 좋아했고 지금도 만화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한 열정은 세월의 흐름에 빛바래고 나는 어느덧 감정을 드러내기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늘 북적였던 버스정류장과 지금은 낡은 표지판만 덩그러니 남아버린 버스정류장의 간극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간극이 서운하지도 않다. 단지 앳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한낱 소재일 뿐….


정유란 대한여자치과의사회 공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