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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내, 그리고 원장’ 오늘도 당당하게 달린다

본지· 대여치 공동기획-대한민국에서 여성 치의로 살아간다는 것 <2>‘진료, 가사, 육아’ 전부 해내는 슈퍼우먼의 비애

‘돼지엄마’는 사교육의 힘으로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엄마들로, 다른 엄마들이 비결을 얻기 위해 새끼 돼지들처럼 따라다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런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나의 온 시간을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것. 아이들보다 먼저 기상하고, 아이들과 함께 문제를 풀고, 아이들보다 더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
애석(?)하게도 현역 여성 치과의사에게 이런 삶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자녀교육은 중요하지만, 그만큼 숭고한 나의 일터 ‘치과’가 있고, 살펴야 할 환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치의와 엄마의 삶을 조화시켜 나갈까? <편집자 주>.

연재 순서 
1. 자부심 높던 20대, 치대서 첫 유리장벽과 만나다
2.‘진료, 가사, 육아’ 전부 해내는 슈퍼우먼의 비애
3.중년 여치의 삶 ‘자신을 찾는 일부터’ 
4. 좌담회 ‘대한민국에서 여성 치의로 살아간다는 것’


새벽에 기상해 아이 논술까지 챙기는 슈퍼맘
원장실에선 간혹 위압적인 상황에 직면하기도


# AM 5:45  기상 후 일간지 3종과 영자신문을 ‘스캐닝’하며 그날의 읽을거리를 스크랩한다.
# AM 06:30  아이들을 깨운 후 간단한 아침식사를 챙기면서 스크랩 기사에 대해 설명한다. 논술은 평소에 시사의 흐름을 꿰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하루도 거를 수 없다.
# AM 07:30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 AM 09:30  출근 후 직원들과 미팅을 하며 환자 스케줄을 확인한다.
# PM 06:30  정신없는 하루를 마치고, 퇴근. 그러나 오늘은 구회 모임이 있는 날. 학원에 있을 아이에게 전화를 하고, 열시 경에 학원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 PM 11:00  녹초가 되는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과 대화를 게을리 할 수 없다. 아빠를 비롯, 가족들이 모여 간단한 음료를 놓고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논한다.
# AM 01:00  귀가하는 첫째를 맞이하고, 잠자리에 든다.

# 자녀교육 인한 경력단절 28% 증가

고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40대 A원장의 하루를 재구성했다. A원장은 주위에서도 ‘슈퍼우먼’으로 불릴 정도로 진료를 비롯해 가사, 자녀교육, 회무를 열정적으로 해내는 인물로 명성이 자자하다. 자녀의 24시간을 밀착 마크하는 다른 엄마들이 가끔 부럽기도 하지만, A원장은 ‘나의 일 역시 소중하다’는 주의다.

모두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B단장의 사례는 좀 다르다. 그는 잘 나가던 원장이었다. 유학 후 강남에 개원, 눈코 뜰 새 없이 환자를 봤다. 진료와 육아를 동시에 챙길 여력이 없었다. 육아는 가사도우미에게 맡겼다. 그렇게 B단장은 6년간 몸과 마음을 소진한 끝에 결국 치과를 양도하고, 이른바 ‘경단녀’가 된다. 

“결국은 몸에 이상이 왔지만, 그보다 아이가 유치원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심히 내향적인 것을 보고 아이를 챙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집에서 10년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가사, 교육 등을 챙겼다. 딸아이가 나중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육아를 책임져야 할 숙명을 받아들이겠다.”

B단장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첫째 아이는 지금 치과대학에 다니고 있다. B단장도 2009년 치과 현장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결혼을 계기로 기로에 마주선다. 통계청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결혼, 임신·출산, 육아, 자녀교육 등으로 직장을 그만둔 경력단절 여성은 214만 명으로 기혼여성의 22.4%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 중 사유를 살펴보면 ‘자녀교육’이 전년대비 27.9% 증가로 가장 큰 증가폭을 보였으며, 육아(9.7%), 임신·출산(5.4%)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결혼에 따른 경력단절은 -8.4%로 감소했다.

고소득 전문직인 치과의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의미한 통계는 없지만, 결혼과 임신, 출산에 직면하면 한번쯤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진다.

30대 후반의 C교수 역시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임신의 계획이 없다. C교수는 “아직도 배움에 목마른 상황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올 공백기가 두렵다. 남편이 잘 이해해주고 있지만, 양가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을 해야할 것 같다”고 밝혔다. 

30대를 시작으로 40~50대를 거치면서 치과의사의 임상술기는 원숙미를 더해간다. 이 상황에서 임신, 출산, 육아는 여성 치의의 경력에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D원장은 “병원을 비울 수 없어 아이 낳고 바로 출근한 선배를 본 적이 있다. 이런 결기가 없다면 출산, 육아, 교육을 동시에 해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 여성 원장은 채용도 곱절로 힘들다?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해서 체어에 맘 편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여성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골머리를 앓게 한다. 대표적인 것이 남성 환자들이 주는 위압감이다. E원장은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손이 떨릴 지경이다.

“2014년, 중년의 남성이 내원해 소란을 피운 적이 있다. 보철치료 컴플레인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던 환자였는데, 내가 보기엔 상태에 이상이 없었다. 환불을 요구해 거절했는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대기환자들 앞에서 해대는 거였다. 처음 치과의사로서 회의감을 느꼈다.”

최근 대한여자치과의사회 정책위원회에서 발간한 ‘치과의사 대상 의료기관 내 폭행, 협박에 관한 설문조사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 치과의사의 77.8%가 연 1~2회 의료기관 내에서 폭행, 협박을 경험한다고 응답했으며, 이중 17.8%는 연 3~5회, 2.7%는 연 5~10회라고 응답해 남성에 비해 훨씬 빈번하게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따른 심리적 후유증 역시 남성에 비해 깊었다.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한 후 결근 등 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밝힌 여성 치의는 11.3%(남성 6.4%)였으며, 77.8%는 무기력 등 심리적 불안을 호소(남성 71.4%)했다.

여성 원장이기 때문에 겪는 채용 상의 애로점도 있다. 여성의 비율이 높은 치과위생사, 조무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여성 원장보다 남성 원장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40대 F원장은 최근 한 달 넘게 면접을 보러 오는 직원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F원장은 “오랫동안 근무하던 직원이 출산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채용공고를 올렸는데, 전화만 수십 통이 왔지 실제로 면접을 보러 오는 지원자가 없어서 속앓이를 했다. 여성 원장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스탭들이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4년 경력의 한 치과위생사는 “여자 원장님은 여자의 심리를 잘 알아서 오히려 어려운 점이 있고, 상대적으로 깐깐하다는 편견 때문에 지원할 때 조금 꺼리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