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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Relay Essay 제2142번째

‘이중섭 화가 탄생 백년의 신화’를 전시한다기에 주말,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덕수궁 앞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아침, 저녁 의장대의 교대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자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조선 말기시절의 복장을 입고 취타소리에 맞춰 교대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자주 보는 우리에게도 신선한 맛을 준다.
나도 옛날 외국여행 시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그 나라의 이런 풍의 교대식을 보고 한나라의 볼거리로 만족해 보았던 추억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의 심경을 이해하기에 나는 옆쪽으로 피해주며 덕수궁 안 현대미술관을 향해 갔다.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 보통학교를 나왔는데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재직 중인 예일대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임용린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6~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다. 제국미술학교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동족살생의 처참한 시기, 누구나 다 여기저기 전전해가며 목숨을 이어가던 때.
이중섭도 통영, 서울, 대구, 부산, 제주도를 전전하다 1956년 41살로 생을 마감했다. 얼룩진 우리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천재화가 이중섭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하면서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자신의 감정표현인 힘찬 황소그림을 쏟아냈다.

때문에 그는 한국의 전통미를 표현한 민족화가로서 추앙을 받았다.

이중섭은 은지화가였다. 그가 새로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 자욱이 남아 그렇게 해서 패인 선으로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된다.

평면에서도 분위기가 생길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도 매우 특징적이어서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기법이나 철제입사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랜 동안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는데 이 은지화들이 벽화를 그리는 밑그림이라고도 했다.

그는 거대한 벽화를 통해서 향유되는 꿈을 새기기도 했다.
그 후 월남한 공예가 유강열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 견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바탕으로 유작인 ‘소’ 연작들을 제작했다.

그리고 최초로 개인전에 참여해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쌓아갔다고 한다. 이중섭은 이때가 비교적 경제적인 생활에 안정적인 시기였다고 한다. 

그 후 사랑하는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떨어져 살며 빚에 시달리고 정신적 질환과 경제적 생활고로 거식증을 동반한 질환을 겪으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그렇게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우리 화단의 뒷면을 보면 사뭇 부끄럽다.
좀 잘나간다는 화가들도 거의 같은 그림들을 수도 없이 그려 파는가하면, 번연히 살아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그려 팔다가 대소동이 일자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가 몰라보겠느냐’는 본인의 절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로잡지 않으면 절필을 한다’는 말에도 끄떡없는 세상이다.

조x남이란 가수가 수십억 저택에 살면서 사이비 화가 흉내를 내어 조수라는 화공을 시켜 수십장의 비슷한 화투그림을 그려오게 하고는 자기 사인만해서 억대의 그림을 팔아 치웠다는 코미디 같은 소식은 또 어떤가.

프랑스화가 밀레의 ‘만종’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해질 녘 농부가 수확을 마치고 감사의 기도를 그린 그림이다. 그도 처음부터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의 그림을 눈여겨봤던 평론가들 중 하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였다.

작품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인 밀레에게 찾아와서 “여보게 친구,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림을 골라 달라고 나에게 선금 300프랑을 맡겨 놓고 갔다네.” 끼니를 걱정하던 밀레에게는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큰 기쁨과 용기를 얻고 생활에 안정을 찾아 그림에 열중해 화단의 호평을 받는 유명화가가 됐다.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된 밀레는 그 후 친구인 루소를 찾아 갔다. 그런데 몇 년 전 루소가 남의 부탁을 받고 사 간 많은 그림들이 그의 거실에 걸려 있지 않은가?

밀레는 남의 이름을 빌려 그림을 사준 우정을 그제야 깨닫고 친구의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처럼 ‘인생의 아름다운 우정도 있다’는 것을 삼가 이중섭의 백년 신화 전에 바친다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왔다.

최 단 최단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