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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대면한 의사의 기록’ 치과계도 감동

故 폴 칼라니티 저서 ‘숨결이 바람 될 때’
죽음과 삶의 의미, 명문장으로 녹여내

“시체 해부뿐 아니라 모든 의학은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다. 의사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환자의 신체를 잠입해 들어간다. 그리고 환자의 가장 취약하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환자를 회복시켜 세상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그에게서 빠져나온다. 신체를 물질이자 구조로 보는 것과 인간의 극심한 고통을 줄이는 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마찬가지 이유로 인간의 극심한 고통은 그저 하나의 교육 수단이 된다.”

신경외과 전문의를 목전에 두고 있던 젊은 의사는 폐암 4기 진단을 받는다. 해부실습실에서 무신경하게 죽음을 절단하고, 죽음을 파헤치던 의사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방문한 죽음의 정체와 삶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다.

“예전에 내가 맡았던 환자들처럼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 “죽음은 누구나 찾는 순회방문객”

서른여섯으로 생을 마감한 미국 신경외과 의사가 남긴 ‘생의 기록’이 한국 치의학계에도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故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흐름출판).

한 치과의사는 “평범한 의사수필로 생각하고 집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의사가 아닌 죽어가는 한 인간이 쓴 삶의 철학으로, 단숨에 읽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죽음을 다룬 책은 많다. 삶의 의미를 다룬 책도 무수히 많다. 이런 의미의 홍수 속에서 이 책을 특별한 의미로 길어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저자의 궤적에서 흐릿하게나마 답을 찾을 수 있다.

스탠퍼드대학에서 영문학과 생물학을 공부하던 저자는 뇌의 작용을 탐구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과학과 의학역사철학을 이수한 뒤 예일 의과대학원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걷는다. 이어 스탠퍼드대학병원으로 돌아와 신경외과 수련의를 거쳐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다 폐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내 죽음의 내원.’

이 책은 죽음과 삶을 소재로 문학, 철학, 의학을 씨줄날줄 엮어 독자들에게 명문장으로 선사한다. 신파로 흐르는 것을 배격하고, 죽어가는 자신의 육체와, 그러나 더욱 명징해지는 삶의 기억과 기쁨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고인이 된 저자에게 송구한 논평이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에 ‘읽는 재미’까지 부여잡은 책이다. 문장들을 소개한다.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것은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살았다.”

본지에 독서칼럼을 연재하는 김동석 원장은 “환자를 대하며 늘 죽음을 지켜봤던 그가 맞이하는 죽음은 생각보다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누리게 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