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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병원 건립 비화

Relay Essay 제2244, 45번째

서울대 치과병원의 역사는 경성치과의학교 치과병원(1922.4.1),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치과병원(1928.1.25), 경성치과대학 치과병원(1945.11.1), 국립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49), 피난시대의 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53.4), 연건캠퍼스의 서울대치대 부속병원(1970~1978), 서울대병원 치과진료부(1978.7.14), 서울대병원 치과진료부 치과병원(1993.5.18) 그 후 서울대병원에서 특수법인인 서울대치과병원(2004.9)으로 발전 되었습니다.(김영해 48년 치대졸 ; 서울대동창회보 제65호 1983.8.1 p.4 치대편, 한기언 49년 사대졸 ; 제 151호 1990.10.1 p.4 서울대의 뿌리 27 치과대학,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사 제2권 1922~2001 p.450에서 인용)

1987.12.30일자 서울대총장(기획 01402-318)으로부터 서울대발전 장기계획 1단계 사업중 연건캐퍼스 계획으로 책정된 ‘치학교육 연구동’ 및 ‘치과진료부’ 시설 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위하여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으로 임명한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1988.1.25일 교수회관 외빈실에서 ‘치학교육연구동 및 치과진료부 신축계획(안)심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이 날 본부에서는 부총장, 기획실장, 교무처장, 사무국장, 시설관리국장, 건축기좌(간사), 기획실행정사무관, 공대 S 조교수가 참석하였고, 의대에서 교무학장보, K, C, S 교수와 치대서는 저와 Y, Y 교수 등 13명이 참석 하였습니다.
 
본부기획실에서 준비한 회의자료에는 치대에서 올린 치학교육연구동 신축계획(안) 및, 치과진료부 신축계획(안)(1988.1), 서울대 장기발전계획과의 상이점 요약 및 관악과 연건캠퍼스의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치대 안(학장 김명국) 요지는 1989. 3월 서울대병원에서 매입 인수 할 예정인 창경국교와 현재 테니스코트, 삼성암연구동이 있는 부지에 치학교육연구동과 치과진료부가 들어가고, 현 도로변에 있는 치대 및 치과진료부를 의대(병원)에 이관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동안 관악 재건에 밀려 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치대로서는 대학과 치과병원의 ‘미래 청사진’을 심의하는 첫 본부 담당자들과의 합동모임 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의 김명국 학장의 부단한 노력과 조완규 총장과의 깊은 신뢰에 따른 배려로 이루어진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기획실장의 회의개요 설명이 끝나자 갑자기 의대 교무학장보 K교수(후일 의학교육연수원장, 가천대 총장)가 긴급발언이라 하면서 ‘치과대학병원 건립에 관한 의대 기획위원회 결정사항’이란 유인물을 배부하였는데 주요 배경 내용은,

1) 연건 캠퍼스는 1890년대 대한의원설립 이래 우리나라 국립의학 발전의 요람으로 되어 왔음.

2) 1960년대 말 소공동에 위치하던 치과대학 및 병원은 소공동 부지를 매각하고 연건 캠퍼스에 약 2,5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병원과 대학건물을 이전해 왔음.

3) 연건 캠퍼스는 현재 이미 부지가 협소하여 도시계획지정 건폐율 수준을 상회하고 있어 장기 발전계획을 수용하는데 한계에 도달하여 있음.

4) 의학의 학문적 성격의 특수성과 아울러 병원은 의학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국민의 기대감 증가에 부응하여 시설 증가가 불가피한 실정이며, 외국의 예를들면 병원 등 의학캠퍼스는 매 30년마다 건축면적이 최소한 2배 이상 증가되고 있음.

5) 의학과 치의학은 학문적으로 충분한 독자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꼭 동일 캠퍼스에 위치할 이유가 없으며, 1978년 서울대학교병원이 특수법인화 될 당시 결정된 치과대학병원의 의과대학병원내의 흡수 조치는 그간 치과대학내 불만 사항으로 누적되어 왔음.

이상의 사유를 참작 할 때 ;
1) 치과대학병원은 금번 신축을 계기로 새로운 장소에 충분한 부지를 마련하여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장기발전계획을 마련함으로써, 치과학문 발전의 국가요람으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 및 병원으로 발전토록 하며,
2) 의과대학 및 병원이 국가중앙기관으로서 충실한 장기발전계획을 마련하는데 있어 협소한 연건 캠퍼스 내에서 약간이나마 여지를 마련할 기회를 부여함.
 
그러면서 의대의 기획위원 명단도 함께 내어 놓았습니다. 마치 치대위원들에게 의대의 어떤 교수가 위원인지 보라는 듯이, 명단에는 학장, 교무, 학생학장보, 병원장, 병원기획조정실장, 간호학과장을 비롯하여 각과 원로교수 등 2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의대 교수는 250 여명이 넘었고 대학의 모든 결정은 관악의 학과장회의처럼 주임교수회의에서 하였으며 전체 교수회의는 1년에 몇 번 밖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치대 교수는 53명 이었는데 6년제 출신 교수는 20명 이었고 직급은 부교수 아래였습니다. 기초학교실은 거의 의대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소공동 치대 교사를 얼마에 매각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저희들은 1969년 12월말 강추위 속에 아직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인 연건동 교사로 이전 하였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정부청사를 지은 풍전산업에서 공사 하였는데(당시 현대건설은 동아일보 옆 청계천 건너 조그만 4층 건물 이었음) 어찌나 미련할 정도로 견고하게 지었는지, 거의 매년 내부를 부셔 리모델링해도 바닥에 균열이 나지 않았습니다.



치원 제3호 (1968. 12. 28 서울대치대 학보사 발행 p.12)에 실린 ‘교사이전과 신임학장(주 : 고 이 춘근 교수)’이라는 대담을 보면, ‘이 학장 ; 신축 치대는 그러니까 약 5억 2,000만원 돈이 필요 하다고 추정되더군, 4월 말부터 이를 위해 나섰지. 처음 문교부 추갱에 승인을 얻은 것이 3억원 , 이것이 5월 3일날 결정이 났는데 경제기획원에서 5월 15일날 1억 2천 30만원으로 최종 결정이 났지’. 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1억2천 정도는 몇 평 짜리 아파트 값인지요? 당시 치대는 관악, 농학, 메디칼 캠퍼스라는 계획에 희생만 당한 것이 아니었는지요?

K 의대 교무학장보는 ‘연건 캠퍼스는 의대만이 사용해도 협소하니 치대는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좋겠다’며 의대 주임교수회의에서도 그렇게 결정하였다고 하였습니다.

K 기획실장도 총장공관 아래 서울시 소유의 공원부지가 있는데 아직은 서울대가 사용할 수 있는 땅은 아니라서… 라면서 끝을 흐렸습니다. 치대가 창경국교를 포함한 연건의 캠퍼스의 정남향의 대지를 사용하겠다고 하니 의대로서는 이 기회에 치대를 연건에서 내보내려고 작심한 듯 하였습니다.

연건에 있던 약대가 관악으로 간 것은 잘 알 수 없으나 종로 6가에 있던 약대가 연건에 있던 음대와 자리를 바꾸었고, 후일 음대는 관악으로 이전하였고 연건의 음대자리에 약대건물(전 치대 2호관) 이 들어섰던 것입니다.

본부도 의대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발언을 중간에 가로채면서 ‘의대가 그토록 큰 계획이 있다면 연건은 좁을 터이니 어디 넓은 땅을 찾아 나가시지요.’라고 발언 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의대가 나갔다면 지금처럼 협소하지는 않았겠고 다른 대형의료원 보다 더 크게 발전 하였겠지요.

저는 ‘치대는 연건캠퍼스 정도면 앞으로도 좁지 않게 사용할 수 있다’면서 의대 더러 연건에서 나가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지요. 그리고 ‘의대 주임교수회의에서 통과된 자료라면 의대 교수회의에 내놓아야지 절차상 이 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자료를 갖고 가서 의대 전체교수회의에서 통과시키고 의대학장이 수신 총장 앞으로 발송하고, 총장의 의사결정에 따라(때로는 부총장, 교무처장 종결)이 회의에 제출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회의는 순식간 긴장된 분위기였고 그 말 잘하는 의대교수들이 몇 마디 하였으나 저는 계속 반박을 하였습니다. 분위기가 험악(?)해 지자 K 부총장은 진화에 나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면서 급히 폐회를 선언하였습니다.

저의 그 날의 발언은 급속히 연건 캠퍼스에 퍼졌고 치대에서는 ‘속 시원하게 잘 해 주었다’라는 반응이 있는 반면 의대에서는 ‘뜻밖에 봉변을 당했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하기야 6·25 전쟁 중 전소된 대학병원 외래진료소 건물에 전쟁의 폐허로 남아있던 한 구석을 밀어내고 들어 온, 치대가 의대더러 연건에서 나가라니 그 분들 마음이 편치는 않았겠지요. 당시 K 위원장님(부총장)의 아들은 의대 본과 4년 학생이었고 K 기획실장과 K 의대 교무학장보와는 경북 왜관의 모고교의 동기동창 사이였습니다.

28년이 지난 지금 의대와 병원은 좁은 연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환자수준도 다른 대형의료원 보다 특히 노인병원으로 시공된 분당서울대병원 보다는 훨씬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지금 병원본관과 시계탑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갱도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한편 치대는 본관건물(연면적 3.664평)외에 테니스 코트 자리에 생체재료연구동(연면적 1.593평)과 교육동(연면적 1.143평)이 들어서고, 창경국교 부지에 신축되는 치과병원 높이가 110여년이 지난 시계탑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간섭도 많았으나 치과병원(진료동, 임상치의학연구동, 지원동 ; 연면적 2.183평)과 관악캠퍼스 치의학대학원(연면적 1.176평) 관악서울대치과병원(연면적 1.176평)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세기 전에 소공동에서 연건동으로 치대를 옮기자며 학생, 교수가 나섰을 때 두 분(고 차문호, 고 김영해 교수) 만이 반대 하셨는데, 지금 소공동 터를 그대로 갖고 있다면 연건 캠퍼스는 모두 사고도 남지 않을까요? 1987년 연건 캠퍼스에서 관악으로 이전 하자는 안을 교수회의에 내놓았을 때도 교수 56명 중 6분 만이 찬성 하였는데 역사는 시대에 따라 아이러니 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자의 몫입니다. 이제는 외형적인 성장보다 내적성장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김철위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