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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忘)에 대하여

Relay Essay 제2262번째

내가 은퇴 전 잠시 근무했던 S 의료원 가까운 곳에 “망우휴식공원(忘憂休息公園)”이 있다.

처음에‘휴식’이란 단어가 좀 의아스럽게 생각이 들었다. 공원이면 으례히 산책하고 휴식하는 곳인데 굳이‘휴식’이란 단어를 왜 넣었을까 궁금하였다. 알고 보니 우리 주위에 흔히 있는 일반 공원이 아니라 사자(死者)들의 영원한 휴식을 위해 만든 공간, 즉 공동묘지인 것이다.

행정당국이‘공동묘지’란 혐오단어(嫌惡單語)를 미화하여 붙여 넣은 것이다. 아마 유일하게 서울시내에 남아있는 공동묘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약 50년 전에는 성북구에 미아리와 용산구에 이태원에도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벌써 오래 전에 그곳은 모두 사라져 지금은 대단위 주택단지로 변해있어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 그곳이 공동묘지 자리였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기록에‘망우리공동묘지’는 1933년에 서울시가 당시에는 도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야산에 설치한 것이였는데 80여년이 지난 오늘에는 도시 한 가운데(중랑구 망우동 산 51-1)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망우리 지명(地名) 유래도 찾아봤더니 조선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았다.

1394년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고 난 후, 무학대사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陰宅:幽宅)을 물색케 했고, 대사가 찾아낸 곳이 양주 땅 검암산 밑에 있는 명당(현 健元陵. 東九陵)을 추천하였으며, 태조가 직접 왕림하여 확인한 후 마음에 흡족하여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서 자신의 음택이 될 자리를 바라보며‘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고 말하여, 여기서 근심(憂)을 잊겠다(忘)는 뜻의 “망우(忘憂)”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의 망(忘)자에 대한 나의 느낌은 솔직히 별로 좋지가 않았다. 기피문자(忌避文字)인 망할 망(亡)자와. 망령 망(妄)자와 음(音)이 같아서 그럴 것이다. 우리가 흔히. 넉사(四)자가 죽을 사(死)자와 음이 같아 회피하여 건물에 4층이나 4호실 등을 표시하기를 꺼려 영문 F로 표시하거나 아예 없애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망(忘)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망할 망(亡)자 밑에 마음 심(心)자가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마음이 망하고 없으니 잊어버린다’를 의미하여 별로 호감이 안들었으며 또 얼핏 떠오르는 단어가 건망증(健忘症)이나 은혜를 잊어 버린다는 망은(忘恩)정도 이었는데, 최근에‘근심을 잊는다는 망우(忘憂)’라는 단어를 알게됨으로 상당히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마치 절(寺刹)에 있는‘해우소(解憂所)’가 편안감과 포근함을 갖게 하고 마치 도장(道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다.

옛날, 어느 서당(書堂)에서 오랜 기간 동안에 천자문을 가르친 스승이 제자들에게‘너희들이 지금껏 배운 글자 중, 나의 일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는 가장 좋아하는 글자 하나씩을 내일까지 적어 오라’고 숙제를 주었단다.

愛. 忠. 孝. 福. 善. 富. 信. 眞. 義. 貴. 禮. 喜. 仁, 美 등이 제출된 글자였다. 내가 봐도 모두 귀하고 좋은 글자들이며 내 경우라도 이 중 한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승은 시큰둥스럽게 흩어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글자 하나를 발견했단다. 바로 잊을 망(忘)자였다. 처음엔 스승도 잘못 본게 아닌가 했으나 다시 봐도 틀림없는 망(忘)자였다. 스승은 한참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그 제자에게 “네가 진정 내 스승이다”하며 큰 절을 하였단다.

70년대에 군인들이 지금의 고달픈 군대 생활을 잊겠다는 뜻으로 큼직하게 “忘”자를 군모(軍帽) 옆에 써 넣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도 있다.

골프 격언 중에는 “지난 홀(hole)에서의 실수는 빨리 잊어라”는 말이 있다. 짧은 거리의‘버디 퍼팅’을 놓친 경우, 퍼팅 거리에 이자(?)가 더커서‘스리 퍼팅’의 경우 등에 화가 머리끝에 올라 있는데 빨리 잊으라니… 너무 어렵다. 그것만 성공했다면 모두가 내 것인데…어휴… 그러나 전 홀에서의 실수가 자꾸 떠오르면 나머지 ‘홀 스코어’마저 엉망이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잊는다에는 기억을 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잊는 경우와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 자체를 억지로라도 잊도록 노력해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기억 속에는 보람, 환희, 사랑, 당선, 선택, 우승, 수상, 긍지, 자부 등의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달콤했던 과거 기억은 오랜 동안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으며 빈곤, 실패, 좌절, 배반, 질병, 억울함, 원통함 등의 슬프고 쓰라린 과거 기억은 빨리 잊고 싶은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일 것이다. 사실 간직하고 싶은 기억보다는 버리고 싶은 기억이 오히려 더 많을 수가 있는 것이다.

화려했던 기억에 매달려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현실을 파악치 못하는 어리석음도, 쓰라리고 불쾌하고 치욕적인 과거 기억에 너무 얽매여 괴로움과 분통함도 모두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잊을 것을 빨리 잊지 못하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은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야 되나,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게 참 문제 일 것 같다.

성경에도, 구약 이사야 48장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과거의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말고 잊어버리라고 분명 말씀하셨다.

또 다윗왕도 전쟁에 승승장구할 때 너무 좋아서, 아들 솔로몬에게 승전 기념으로 반지를 하나 만들어 거기에 마음에 새겨둘 문구를 새겨 오라고 부탁했는데 솔로몬이 고심하여 반지 속에 쓴 글귀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This will also pass away soon)”이었다. 이 또한 모든 것이 지나가니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는 뜻 일거다.

이젠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생각해 보자.

큰 은혜를 받고 절대 잊지 않는다는 말에‘백골난망(白骨難忘). 각골난망(刻骨難忘)’이 있으며,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애틋한 오매불망(寤寐不忘)이 있고, 그러나 받은 은혜를 잊고 의를 저버린다는 말인‘망은배의(忘恩背義)’와‘배은망덕(背恩忘德)’등이 있으며 모두가 잊을 망(忘)자가 들어갔으나 전자는 절대 잊지 않는다의 뜻이고후자는 인간의 도리를 저 버린다는 뜻의 전혀 상반된 단어이다.

중국에서도 인간이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효(孝=부모 공경), 제(悌=자기보다 못한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 충(忠=국가에 대한 충성의무). 신(信=어진 마음). 예(禮=예절). 의(義=불의에 대항). 염(廉=절제와 근검). 치(恥=부끄러워 할 줄 앎) 이 여덟을 팔덕(八德)이라 하고, 이를 잊어버리는 사람을 忘八(왕빠)라 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는다.

또한 잊지 못함도 한번 살펴보자.

우리가 학창시절에 수학공식. 어학문법. 화학구조식 등이 너무 어려워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는 “한번 외우면 절대로 잊지 않는 두뇌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가” 한 적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거다.

그런데 기록을 찾아 보니 그런 사람이 몇 있었다. 소련의 신문기자인‘솔로몬 세레세프스키’가 그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여 그에게는 대화 속기록 작성이 필요 없었단다.‘16년 전 3월 7일 오후 2시에 내가한 말 중 28번째 단어가 무엇이었지요?’라는 질문에 거침없이 척척 정확한 대답을 할 정도이었다.

또 한 사람, 미국 여성,‘질 프라이스’도 그랬다. 15년전 일‘1979년 10월 19일 무엇을 했나요?’라는 질문에‘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이상하게 날씨가 너무 추워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따끈한 수프를 먹었어요’ 그 밖에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날은 물론이고 해마다 요일과 날짜가 바뀌는 부활절도 어김없이 정확하게 알아 맞혔다는 것이다. 결론은 중요하지도 않는 일도 잊어버리지 못하고 전부 기억하는 ‘자서전적 기억’을 가진 사람들 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의 능력은 절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라고 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 싫은 괴로움 등이 수시로 떠오르고 잊고 싶은 너무나 괴로운 기억 때문에 기억이란 감옥에 갇혀 사는 결과가 되었고 그들은 훗날에 결국 정신질환을 얻게 되고 불행한 삶을 마쳤다 한다. 천재적 기억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듯 하다.

“망(忘)” 얼마나 평화로움이 서려있는 글자입니까? 지난날의 뼈아픈 상처도 그리고 환희의 떨림도 거듭된 세월 속에 회색빛 망각으로 사라져 가게 하는 하늘의 조화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이 순간에도 잊음의 평화로움을 얻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되어 산다면 얼마나 괴로움에 시달리겠습니까. 훌훌 털고 잊고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