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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의 정치적 의미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제2권 첫머리에 오뒷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여한 아버지에게서 오랜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자, 이타카의 귀족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소집한다. 그리스 원어인 ‘라온 아게이렌인’(laon ageirein)이란 말은 ‘군대를 아고라로 소집한다’는 의미이다. 라오스(laos)란 말은 본래 미케네 시절의 전사들의 회합을 가리키던 말이다.

전사들은 군사적 형태, 즉 원을 그리면서 소집된다. 오늘날 군대의 명령자가 자신의 부대원을 소집해 명령을 내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들은 이 원을 이세고리아(isēgoria)라고 불렀고, 여기서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동등한 권리’(equal freedom of speech)가 주어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공개토론을 하기 위한 공공의 장소인 셈이다.

이 전사들의 모임을 구성하는 ‘평등한 자들’의 집회는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언하는 중심을 둘러싼 원형적 공간을 이룬다. 이 고대의 군사적 집회의 성격이 도시국가로 이어져 ‘아고라 문화’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이 광장에서 모든 시민들은 자신과 관련된 온갖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었다. 이 토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소수의 지배자에 좌지우지되던 사적인 공간에 대립하는 하나의 공적인 공간,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하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 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소피스테스요, 소크라테스였다. 이 아고라 공간이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공간이자, 교육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철학이 잉태했고, 민주주의 싹이 트고, 언론의 자유가 꽃폈던 것이다. 이 공간 안에서 각 시민들은 동등해지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광장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자유로운 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은 아고라란 정치적 공간에서 평등한 자(isoi)와 동등한 자(homoioi)로 규정된다. 시민들 서로간의 동일성과 대칭성 속에서 ‘생각하는 사회’가 태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공간 속에서 직접 민주정이 실현되었다. 원형을 이루는 중심을 지닌 광장이라는 지리적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마침내 ‘정치적 공간의 틀’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정치적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균형성, 상호성, 동등성, 대칭성이다. 동등성의 확보는 원이라는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원의 중심에서 그어진 원주 상에 모든 시민은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누구도 중심으로부터 더 가까운 사람도 더 먼 사람도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정치적 공간인 아고라에서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민주정치는 근본적으로 웅변술의 경쟁, 말로써 싸울 수밖에 없는 쟁론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쟁론적 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신성한 제의를 받드는 아크로폴리스와 대비되는 공공의 공간, 바로 아고라인 공공의 장소였다.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던 아고라란 사회-정치적 공간은 중심(meson)을 둘러싸고 조직되었다. 중요한 정치적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중심’ 개념이었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이루어진 신성한 정치적 공간인 아고라를 다시 마주하고 그 중심에 우리가 서 있음을 본다. 그 광장에 들어선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 시민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발언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다. 이 참여 민주주의 실현이야말로 고대 민주정의 이상이었다. 고대의 민주정의 이상이 우리의 정치적 광장에서 실현되고 있고, 정치적 문제들이 평등한 자들인 모든 시민에 의해 토론되고 논의되는 새로운 광장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민주적 삶의 정치적 문화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재홍 연구원
숭실대학교 철학과 대학원·박사 졸업
캐나다 토론토대학 고중세철학연구소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대학 인간학 연구소 전임연구원
충북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관동대학교 인문대학 연구교수
전남대학교 사회통합센터 부센터장
현) 정암학당 연구원(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