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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치과의사로 산다/수필

‘여자 선생님이라서 좋아요.’

치과에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나는 긴장이 된다. 젠더에 의미를 부여 받는 일은, 그 의미가 아무리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저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두 가지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해 내야만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저 환자분의 불편한 구강 내 병증을 치료하고 편안하게 저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통상적인 치과의사로서의 역할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저 환자분이 내면 깊숙이 가지고 있을 ‘여성 술자에 대한 기대 심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하는 ‘여성 치과의사’로서의 역할이다.
 

 10여 년 전에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한 후,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왔다. 그 분들 중에서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유난히 의미를 부여했던 분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받았던 ‘냉대’과 ‘기대’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새내기 시절 아직 빳빳한 가운을 입고 서 있던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남자 원장님은 어디 갔냐고 반말로 물어보던 환자 분이 있었다. 그래, 이런 냉대는 차라리 괜찮은 편이었다.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가며 여자 선생님이 계신 치과를 찾아 멀리서 왔다고 하소연했던 보호자(어머니) 분이 있었다.

 

유난히 겁이 많은 아이이지만 유치원에서도 여자 선생님 말은 잘 듣는다고 했는데.... 진료실이 떠나가도록 엄청 나게 울던 그 아이는 결국 치료를 받지 못하고 대학병원 소아치과로 가야했다. 기대란 충족되지 못하면 실망의 화살촉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치과를 나서던 그 아이와 어머니의 뒷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박힌 채 잊혀 지지 않는다.

 

이 외에도 많았다. ‘여자 선생님은 마취를 안 아프게 할 것 같아서 여기에 왔다’, ‘여자 선생님은 발치하자는 소리를 안 할 것 같아서 여기에 왔다’.... 이쯤 되면 내 능력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 경지다. 선배 여성 치과의사들은 정녕 원더우먼이었다는 말인가!
 

 솔직히 환자분들의 이러한 기대는 늘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그 기대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주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는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은 본능의 영역이다.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직장 여성의 심리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직장 여성이 직장 내에서, 또 가정에서 자신에게 이질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것처럼(그 두 가지 역할이 모두 적성에 맞는 여성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여성 치과의사로서 환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아무리 자기표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는 해도, 다른 누구도 아닌 환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순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그들의 기대가 왜곡된 젠더 가치관의 소산물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 아님에도 늘 아이들을 달래보려 애썼고, 환자분들과 부드러운 소통을 하는 데에 공을 들이곤 했다.

 

나는 환자들의 구강 내 병증을 제거하고 보다 좋은 예후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는 치과의사의 일반적인 역할 앞에 ‘안 아프게’ 혹은 ‘편안하게’ 라는 족쇄 같은 수식어를 스스로 꾸며 넣은 것이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여성 치과의사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한 결과인지,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치의로서의 각오인지는 정확히 분간해내기는 어렵지만.
 

 최근에 세계 각종 영화제에서 25관왕을 달성한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의 인터뷰를 보았다. 한국의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자라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선물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한국 남자였거나 미국의 백인 남성이었으면,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남자 치과 의사였다면 몰랐을 것이다. 조금이나마 덜 아프게 치료 받고자 여성 치과의사를 찾아 헤매는 환자도 있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환자 입장에서의 편안함’에 대해 고찰하고 노력하는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쩌면 나에게도 선물일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환자를 위하는 치과의사가 되고 싶다. 젠더의 의미를 넘어 자유롭게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