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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텍트 시대, 보고 싶은 얼굴들

Relay Essay 제2412번째

사상 초유의 코로나 사태에 전 세계가 휩싸이며 민간 차원의 해외 활동이 거의 차단되었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운 일은 지난 16년 동안 거의 매해 오뉴월이면 어김없이 찾아갔던 키르키즈스탄 방문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2004년 선배 안과의사의 권유로 우연히 키르키즈스탄을 방문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려인의 존재와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집단 거주지의 학교에서 고려인 3, 4세대 아이들을 치료하면서 며칠 사이에 흠뻑 정이 들어 버렸고 아쉬운 이별의 순간에 내년에 또 오겠다고 쉽지 않은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해마다 15~20명의 치과봉사팀을 구성하여 키르키즈스탄을 방문하고 있다.

 

키르키즈스탄은 전체 중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지역으로, 그 곳에는 우리와 다른 듯 하지만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있고, 60~70년대 우리가 자랐던 고향과 거의 똑같은 시골정취가 남아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핏줄인 고려인 동포들이 2만여명 거주하고 있다. 그 것이 바로 매해 키르키즈스탄을 찾아가는 이유이다.

 

고려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러시아어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족 또는 고려사람이라고도 한다. 1863년으로, 이 땅에서 배고픔에 지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 유역에 정착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이후 농민들과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주가 계속되어 절정기에는 20만명 정도의 공동체로 성장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 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강제 이주된 고려인 수는 17만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무려 1만1000여 명이 이동 도중에 숨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시베리아의 매서운 칼바람 속에 버려졌으나 고려인들은 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 집단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1992년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재산을 빼앗기는 등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는 혼란에 빠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들은 러시아인도 키르키즈인도 아닌 여전히 고려인, 까레이스키 라는 이름으로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의 직항편은 아직 없다.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티’로 가서 키르키즈스탄의 수도인 ‘비쉬켁’까지 환승한다. 알마티에서 비쉬켁까지는 프로펠러 비행기로 톈산산맥을 넘는데 날씨가 험한 날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흔들림을 각오해야 한다.

 

키르키즈스탄 봉사팀은 전국의 미르치과에서 지원한 4~5명의 치과의사와 10여명의 치과위생사 등 자원봉사자로 구성되는데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치과진료의 특성상 장비와 기구 재료 등이 많고, 무거워 공항에서 항상 중량초과에 따른 추가운송료를 지불하는데 적게는 1백여만원에서 많게는 3백여만원까지 지불한다. 그 돈이면 현지에서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물품 등을 얼마나 더 사가지고 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늘 안타깝다. 매년 5월말이나 6월초의 현지의 농한기에 맞추어 방문하는데 일주일 정도의 기간에 보통 서너 곳을 옮겨 다니며 진료를 한다. 현지 도로와 차량이 열악하여 비포장길을 너 다섯 시간을 달려 몇 곳을 옮겨 진료하는, 잠시도 쉴 틈이 없는 강행군이다.

 

진료는 발치를 기본으로 아말감, 글래스아이오노머, 레진 등의 충전과 근관치료 등을 주로 한다. 어느 지역이든 주민들이 수백명씩 몰려오지만 제한된 시간과 인력으로 다 치료하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점은 늘 가슴 아프다. 고려인 거주 지역에서는 치과진료와 더불어 영정사진과 가족사진을 찍어 액자에 넣어 드리고, 저녁에는 위문잔치를 해드리는데 흥이 오르면 두만강, 황성 옛터 같은 옛 노래와 조용필 씨 등의 노래를 즐겨 부르신다. 마지막 곡은 항상 아리랑을 부르는데 타국에 버려진 한이 절절하게 묻어나 우리 모두의 눈시울을 젖게 만든다. 경로잔치에서 우리들의 볼을 친손자, 손녀같이 어루만지시던 그분들의 굽은 까칠한 그 손마디, 영정사진을 받아 들고 환히 웃으시다 뒤돌아서 홀로 걸어가시는 그 쓸쓸한 뒷모습,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하며 눈가에 맺히던 그리움의 그 눈물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하루 빨리 코로나가 종식되어 내년에는 꼭 다시 만나 뵙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