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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각(咸珏) 선생을 떠나보내며

특별기고

지난 3월 14일 스산한 기운이 감돌더니 비보가 날아왔다. 함 각(咸珏) 선생님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 선생님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이제 그 끈마저 끊어져 버렸다니 애통할 뿐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빈소를 찾았다. 활짝 웃는 영정사진 속 모습이 나를 반기며 위로해 주는듯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한 달 전 통화했을 때만 해도 건강이 괜찮다고, 봄이 되면 한번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정말 섭섭했다.


빈소 주위를 둘러보니 박태근 협회장, 변웅래 강원지부장, 이해준 대한치과의사학회장, 진보형 치의학박물관장, 권 훈 대한치과의사학회 부회장 등 조화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시 치과의사회에서 보낸 조화가 눈에 띄지 않아 섭섭했다. 함석태 선생님이 만든 한성치과의사회를 서울시 치과의사회 연원으로 삼지 않았던가. 선생님에 대한 예우가 말이 아니다. 

 

함 각 선생은 80세 되던 해에 나와 만나 할아버지인 함석태 선생에 대한 소중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좌담회도 가졌고, 함석태 흉상 제막식도 함께했다. 또 개인적으로도 몇 번 만나 함석태 선생님과 가족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던 분이다.

 


함 각 선생의 비극과 고통은 함석태 가족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비극이었다.

 

함석태 선생님은 해방 전 1945년 6월경 서울에 총독부 소개령이 내려져 아끼던 금강산 연적 등 국보급 소장품을 싣고 평남 구장역 근처에 머무르셨다고 증언했다. 구장은 영변 본가에서 청천장 건너편에 역이 있는 마을이었다 한다.

 

함석태 선생님은 짐도 풀지 않은 채 그곳에 머무르시다 김일성 공산당이 집권해 토지 등을 몰수하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게 여겨 짐을 싣고 해주로 가서 남한에 가시겠다며 서울에서 만나자 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함 각 선생은 해방되고 나서 김일성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해 집을 잃고 이곳저곳 다니시다 1950년 12월 추운 겨울 원산 철수 당시 미군 함정에 겨우 몸을 싣고 부산항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당시 나이 14세로 큰형 함 완(咸玩)과 함께했다고 한다.


재산목록인 미싱 머리만 안고 다니다 원산 철수 시 미싱을 버리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다는 미군의 말에 원산 앞바다에 던져버리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형님은 토지와 집문서만 챙긴 채 월남했다 한다. 집문서가 남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피난살이 하다 서울 가면 할아버지를 만난다는 일념으로 어렵게 상경했다. 할아버지 함석태를 만날 수 있으라는 희망을 안고 서울에 왔지만, 계시리라는 할아버지는 안 계시고 함석태 치과의원이 있던 집은 삼각동 동사무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월북한 빨갱이 재산이라고 돌려주지 않았다. 생각 끝에 형 함 완이 할아버지 사랑방 모임에 함께 했던 실세 장택상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그 집을 되돌려 받아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고 한다.


함 각 선생은 '치과 임상' 신종호의 부탁으로 함석태 선생님 사진 찾기에 나섰다 한다. 사진 한 장 찾아보자는 일념으로 백방으로 수소문해 겨우 사진 한 장을 얻게 됐다고 한다. 함석태 할아버지가 강우규 의사의 손녀 강영재를 양녀로 삼아 돌봤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강영재의 아들을 찾아 어렵게 가족사진 한 장을 얻었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 유일한 함석태 선생의 사진이다.

 


어느 날 함 각 선생은 그 귀중한 사진을 나의 치과로 가져와 나에게 주셨다.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함 각 선생과 함께 한중석 치대 학장실에 가서 치의학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잘 보관되고 있다. 함 각 선생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그 사진 한 장조차도 볼 수 없었을 텐데 그 귀중한 사진을 얻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


장례식장에서 내려오는 길은 봄바람이 내 뺨을 더욱 차갑게 때린다. 치과의사 3만2000여 명 중 유일하게 나 혼자 문상하고 오는 기분이 너무 씁쓸했다. 유족들에게 미안했다. 함석태 선생님의 공적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생각만 복잡해진다.


함 각 선생님 편히 가십시오.

죄송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