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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가을이면

종|교|칼|럼|삶


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가을이면


제가 일하는 유치원의 3주간의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 뒤 두 번째 주간은 매일 안개비속에 살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물난리에 많은 피해를 입는 동안  이곳 페로에 제도의 사람들은 계속 안개속을 헤메이며 가까이에 있는 섬이 안개 속에 사라져버렸다고, 파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이런한 몽롱함 속의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비바람이 조금씩 불면서 안개가 겉히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동안 나가지 못했던 아침 달리기를 일요일 아침 6시 30분 정도에 일어나 나갔습니다. 이곳의 주말의 아침은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아주 조용합니다. 밤 늦게까지 놀다가 아침 늦잠을 즐기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틈을 아주 잘 이용하여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지요.


주간에는 가까운 공원의 몇 바퀴를 돌아 30분 정도를 뛰고, 주말에는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아 45분 정도를 가볍게 뛰다 돌아오면 몸과 마음, 온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 맑아지니 아침 기도 전의 준비 운동으로 참 좋습니다. 8월 중순이 넘어 말에 가까운 날이었지만 얼마나 상쾌하고 싱그러웠던지 문득 가을의 향내가 물씬 풍겨오더군요. 이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지…. 생각만 해도 저의 가슴은 다시 벅차 오릅니다. 이렇게 가을이면 생각나고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이 있음은 참으로 행복입니다.


지난 해 가을인 듯 싶습니다. 아는 한국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녹차 다기세트를 이용하여 공동체의 다섯 수녀님들께 다도예절을 추석날 저녁 휴식시간에 선 보이려고 며칠 전부터 한국 부채에 초대장을 오려 부쳐 식당에 걸어놓았습니다. 녹차를 좋아는 하지만 다도예절에는 문외한이어서 한국 방문때 처음으로 친구 수녀님으로 부터 대충 설명을 듣고 복사를 몇 장 해왔었지요. 그리고 아는 수녀님께 받은 여자, 남자 한복 한 벌을 유치원의 저의 반 아이들에게 입히고는 몇 번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호기심에서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아이들도 녹차를 좋아하더군요.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한 남자 아이가  한복을 입고서는 얼마나 진지하게 앉아 차를 마시던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중국에서 입양된 자그마한 여자 아이에겐 한복이 너무 컸지만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저도 한 번은 한복을 입고 등장했지요.  한 구석에서 커텐을 치고 몇 겹의 옷을 걸치느라 시간이 걸리니까 언제 나오느냐고 보채는 아이들의 소리에 저는 노래를 하나 부르고 나서 열까지 세면 나올거라고 했지요. 저의 한복 입은 모습을 보고는 직원들도 몰려왔습니다. 제가 먼저 차를 준비하여 한복 입은 남자, 여자 아이에게 대접을 하였고, 다음에는 이 아이들이 직접 차를 따라 주면  관람객석의 다른 아이들이 둘 씩 짝지어 와서 받아 마셨지요. 다도예절을 마치고 선을 보인 아이들이 구경한 아이들을 향해 엎드려 큰 절을 하는 모습은 귀엽고도 우스웠습니다. 


이 다도 예절을 아이들과 해보느라 저는 비내리는 날에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한복을 들고 출근을 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이 날씨타령을 하며 투덜거리동안 저는 말했지요. 이런 날은 안에서 오붓하게 지내라는 초대라고요. 


추석 전 날인 토요일엔 김밥을 말아서 몇 접시를 만들어 아는 친구들에게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저는 어느 새 어린 시절의 추억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친척들 중에 제일 젊으셨던 저의 엄마께선 뒷밭의 단감을 따고 송편을 미리 해서 큰 집과 작은 집으로 저를 보내곤 하셨지요. 페로에 제도에서 마침 이 날 저녁 때쯤, 큰 슈퍼에서 팔고 남은 것을 받아와서 필요한 이들을 위해 채소, 과일, 빵 등을 여러 상자에 나누어 담는 마리사 수녀님을 저도 돕고 있었지요. 이 모습 역시 가을 추석 무렵의 향기, 나눔과 풍성함의 기억 속으로 저를 데려 가고도 남았습니다.


드디어 한가위 저녁, 한국에서 가져온 쌀과자를 다식으로 대신하고 나름대로 다도예절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물론 저도 한복을 입고는 기억나는대로 이 예절에 대해 설명을 하고 약간은 떨리는 마음과 손가락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마치 대중앞에서 실기 시험을 치르는 학생이 된 느낌이었지요. 어느 수녀님은 나중에 그러더군요. 차 보다는 쌀과자를 먹는 차례를 기다리느라 애를 먹었다나요?


모든 것이 침묵안에서 이루어지는데 다식을 대신한 바싹 구운 쌀과자를 이 침묵을 깨기에 충분했기에 우리도 예절의 규칙을 깨야만 했습니다.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너무 떨어서인지 녹차의 양이 적어 맛이 너무 약했나봅니다. 그러나 모두들 숙연하게 예절을 잘 따라주셨기에 감사드렸지요. 끝나면서 우연히 창밖을 바라보니 우리들의 다도예절에 참여한 또 다른 이가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바로 남산 위가 아닌 남쪽 섬위에 두둥실 떠오른 쟁반 같이 둥근 달님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회에는 콩고 출신의 신부님과 네델란드 수녀님이 오셨을 때, 이 분들 역시 다도 예절에 초대를 했습니다. 끝나고 자리를 뜨시면서 신부님은 말씀하셨지요. 참 좋은 생태학적인 저녁나절이었다고요. 생각해보면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선한 물을 데피는 시작부터 뜨거운 물로만 헹구는 설겆이 끝 손놀림까지 인간의 눈, 코, 입, 손 등 온 몸의 감각을 사용하여 자연과 만나 서로 어우러져 하나되게 하는  이 소박한 예절이 때로는 아주 거룩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보통 이곳에서 차를 마시자고 초대를 받아 가보면, 케익을 위해 차를 마시는지 차를 마시기위해 케익을 준비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물들어 가고 여물어가는 가을이면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이 자연의 섭리에 물들어가고, 태초에 참 좋게 만들어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본래의 성품대로 잘 여물어가길 바래봅니다.  이렇게 가을이면 울긋 불긋 물들어가는 고국의 가을 산천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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