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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긴 겨울의 짧은 모둠 이야기

종|교|칼|럼|삶


이연희 플로렌스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긴 겨울의 짧은 모둠 이야기


양들의 섬의 겨울은 10월 말경부터 어둠의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찾아오는 듯 합니다.  보통 10월 4일 이면 첫 눈이 내린다고 이곳에서 50여년을 넘도록 사신 큰 언니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올해는 10월 18일에 갑자기 첫눈이 말 그대로 펑!펑!펑! 내리더니 3일을 연속 내렸지만 쌓이지는 않고 금방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여는 유치원의 밖은 여전히 캄캄하여 어린 아이들은 밤인지 아침인지 분간을 못하기도 하지요. 오후 2시 반이 넘어가면서 어느 새 밖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곳의 사람들은 겨울이면 무척이나 빛을 그리워합니다. 11월말로 접어들면서 작은 전구들로 집주위를 온통 휘감아 온 밤을 밝히는 한 집이 수녀원에서 아주 눈에 띄게 잘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집안에 밝은 전구보다 은은한 빛의 전등을 사용하고 곳곳에 촛불을 밝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 나누며 시간 보내기를 무지 좋아합니다. 그래서 11월 말과 12월은 ‘성탄’이라는 이름 아래 이런 만남의 시간들이 많아 어른 아이 구분없이 모두가 이곳 저곳으로 바삐 뛰어다니지요.  이곳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전통처럼 겨울에 치르는 것 중에 하나가 ‘산타 루시아’입니다. 12월 13일이 바로 이탈리아의  성녀 루시아의 축일인데 ‘루시아’라는 이름이 ‘빛’을 시사하기에 유치원과 학교에서의 최고 연령의 아이들이 머리와 팔을 위해 구멍이 뚫린 하얀 천의 옷을 입고 손에는 전등용 촛불을 들고는 ‘산타 루시아’ 노래를 부르며  건물의 전체의 안를  한바퀴 돕니다. 제가 일하는 유치원에서는 12월의 어느 한 날을 잡아 모든 부모님들을 초대하여 어둠속에서 이 행진이 이루어지고 아이들의 성탄 노래들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몇몇의 양로원들을 여러 날에 걸쳐 방문하여 이를 선보이기도 하는데 엄청 큰 양로원을 한 바퀴돌며 노래한 후에는  아이들은 거의 녹초가 되어버리지만 그들의 장난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곳 페로에제도에의 겨울에 또 하나의 전통이 있다면 이는 성탄 자정미사 입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정미사가 있는 곳은 저희 성당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24일 저녁 5시정도의 루터교 교회에서의 성탄 예식을 마치고 가족들과의 밤샘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 잔치 중에도 이 자정미사에 참여하려고 빠져 나온 이들이 많습니다. 아담하고도 작은 저희 성당은 일년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므로 더러는 자리를 잡아달라고 미리 전화하는 이들도 있지요. 미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라디오로 생방송이 되는 이 미사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것을 떠나 인간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갈망하는 것을 향유하기 위해 모두가 하나되는 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추워지기 전에 겨울 김장을 하지요.  어느 날 우연하게 한 신자분이 메일로 BBC에서 찍은 서울에서의  270톤의 김장을 담는 사진을 보냈더군요. 저도 마침 오랜만에 배추를 싸막하게 파는 곳이 있어 큰 맘 먹고 고르고 골라 아주 통통한 두 포기를 사 둔 날이였기에 혼자서 웃으며 저도 김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두 포기를 한꺼번에 절이는걸 시도했는데 마땅한 그릇이 없었고 잘게 썰은 배추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김장담는 것처럼 전날 저녁나절을 절이고 밤새도록 물빠지도록 내버려두는 등 준비의 시간이 너무오래 걸렸습니다.  다음 날엔 마늘과 고추가루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강하고도 독특한 냄새가 다른 수녀님들의 인상을 구길까봐 밖에 있는 곳간에서 마음 놓고 김장 담는 예식을 혼자서 의미심장하게 치루었다면 믿으실런지요. 실은 우리가 하는 크고 작은 모든 것에 좋은 지향을 두고 마음과 혼을 다해 행한다면 이는 삶의 의미를 주는 행위, 의식이 된다는 것을 배운 기회였습니다.


제 삶을 차지하는 거의 대부분이 거져 받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저 역시 작은 것이라도 거져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김치를 좋아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몇 개의 작은 병들에 김치를 따로 담기도 하고, 땅속에의 보관이 불가능하여 비닐 봉지에 나누어 담아 냉동도 시켰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김장아닌 김장을 담은 것 같아 배시시 웃음이 나옵니다.


저는 이곳 한 여름의 대낯처럼 밝은 하얀 밤을 좋아하지만 어둠에 잠겨있는 겨울의 까만 밤도 좋아합니다. 빛이 물러나고 어둠이 찾아오면 살아 숨쉬는 모든 존재들이 밝은 빛 아래 하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각자의 은신처로 돌아가 몸과 마음과 정신을  쉬게 하니 뭐라고 할까요, 참 포근하다고나 할까요? 이것이 바로 밤에 대한 저의 순수한 느낌이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는 은총이요 축복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번은 한국에서 경상남도 ‘산청’이라는 산골 나환자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어느 겨울의 칠흑같은  밤이었나 봅니다. 그 밤이 좋아 한참을 쳐다보고 있는데 한 가지 아쉬운게 있었습니다. 간간히 가로등이 보였거든요  “밤이 밤이고 싶어도 밤일 수가 없구나”라는 탄식아닌 탄식이 제 안에서 흘러나오더군요. 달빛이 환하게 내리비치는 밤이면 오로지 그 빛만으로 밤을 만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어릴적 어느 한가위 무렵의 가을밤, 우리 집 마당 한 가운데에는 덕석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서 저는 엄마를 도와 지금은 어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날의 훌테에 벼를 훑으는 일을 달빛 아래에서 했지요. 표현할 수 없는 그 환상적인 푸르스름한 달빛이 가득한 밤의 분위기는 저의 기억에 생생하게 살아있어 보름달이 뜰 때마다 저의 마음은 그날 밤의 향수에 흠뻑  젖곤 합니다. 어둠에 쌓인 방 안에 불을 밝히고 커텐을 쳐서 아늑한 분위기로 저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방 안의 불을 끄고 커튼을 활짝 열어 밤의 품에 안겨 잠드는 것, 참 행복한 순간입니다. 전등이 켜지지 않은 기도실에 앉아 있는 것도 참 좋습니다 : 예수님의 현존을 알리는 감실 옆의 성체등의 심지불이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게 춤을 춥니다. 내 안에 불을 끄면 내 밖의 것이 더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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