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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자다 씨의 시간

종교칼럼

‘피르자다 씨가 식사하러 왔을 때’는 줌파 라히리의 단편소설 제목이다. 피르자다는 지금은 방글라데시의 수도이지만 과거에는 파키스탄의 일부였던 다카에서 식물학 교수로 재직하던 사람이다. 정부의 후원으로 뉴잉글랜드 지역의 나뭇잎을 연구하러 미국에 온 사이 조국은 내전에 휩싸였고 다카에 남아있던 가족들과의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인도 출신의 대학 교수인 ‘나’의 아버지는 피르자다 씨를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나누곤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먼 훗날까지도 음식을 먹기 전에 피르자다 씨가 했던 이상한 행동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가슴 호주머니에 넣어둔 시곗줄이 없는 평범한 은색 시계를 꺼내 주위에 흰머리가 촘촘히 난 귀에 잠깐 갖다 댄 다음, 엄지와 검지로 재빨리 태엽을 세 번 감았다. 그는 나에게, 손목에 찬 시계와는 달리 호주머니 시계는 다카 지역의 시간에 맞춰져 있어서 열한 시간 빠르다고 설명해주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 시계는 커피 테이블 위의 종이 냅킨에 놓여 있었다. 그가 그 시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축복받은 집>, 마음산책, p.59)

피르자다 씨가 커피 테이블 위에 은색 시계를 내려놓은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 의례적인 동작은 독자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한 마디 말도 없고, 시계를 들여다보지도 않지만, 그 절제된 몸짓이 자아내는 뜨거움이 크다. 그 시계는 그리움이고, 가족들이 안전하기를 비는 기도이고, ‘이곳’과 ‘저곳’ 사이의 어긋난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피르자다 씨가 그 곤혹스런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위해 식탁을 차리고 함께 뉴스를 보며 안타까워 해 줄 수 있는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오랫동안 바라고 꿈꾸던 일이 어그러지자 큰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그런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친구가 그들 부부를 좋은 식당으로 초대했다. 그 일에 대해서는 피차 언급을 자제했다. 하지만 친구의 따뜻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랍비의 마음은 이미 평화로워졌다. 친구가 대접한 음식은 애정 어린 돌봄의 상징이었고 성찬이었다. 유대교에는 ‘북돋는 식사’(meal of replenishment)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유족들을 위해 친구들이 식탁을 차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이 차리는 것은 베이글과 커피 정도이지만, 그것은 크나큰 상실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벌써 6개월을 향해 가고 있다. 설만 무성할 뿐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그 사건이 잊혀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그 사건이 망각의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서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고, 지향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피르자다 씨가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은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열한 시간 차이가 난다. 그 ‘시차’가 피르자다 씨의 현실을 힘겹게 만든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을 통해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태도를 밝히고 있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이의 상실 혹은 자기가 집착하고 있었던 이상의 좌절에 대한 반응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현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상실의 충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을 자아 상실로 받아들인다. 커다란 상실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당사자가 현실을 수용하기까지 주변 사람들은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해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해라’, ‘그 문제에 붙들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가 가하는 폭력이다.

문제는 우울증이다. 너무나 억울해서 사랑하는 이를 차마 떠나보낼 수 없는 이들의 경우 정상적인 삶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내면이 황폐해지기 쉽다. 지금 무엇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상규명이다. 왜 사랑하는 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는지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들의 우울증은 더 깊어질 것이다. 그들에게 또 필요한 것은 ‘이웃’이다. 애도의 시간을 함께 해주는 사람들,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 그들을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인도해 줄 벗들 말이다. 예수는 ‘누가 내 이웃이냐?’는 한 젊은이의 질문에 사람의 사람다움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이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