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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악산 이야기

Relay Essay 제1997번째

침실 커튼을 접으면 백악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자하문 가까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보현봉도 보일 정도였다.
빌딩이 들어서면서 시야가 좁아져 청와대와 백악산만 보인다.
풍설(風雪)이 가고 화창하다가 녹음이 짙어지는 백악산은 소년시절부터 오르고 싶던 산이다. 백악산 자락인 삼청동과 청운동에서 살던 때도 막혀서 오르지 못했던 산이다.
청명(淸明)한 가을 날 2014년 9월 20년, 드디어 백악에 올랐다.

백악산 접근 시작
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면 왜 그렇게 좋았는지.
중학교 1955~1957때, 반 친구들과 혜화동 교정을 나와 창경궁 - 원남동궁남동으로 바꿔야. - 비원 앞 - 안국동 - 광화문 - 경복궁 영추문 - 효자동 전차종점당시는 원효로 - 서울역 - 광화문 - 효자동, 현 청와대 입구까지 지상 전차가 다녔다 - 경무대옆현 청와대 - 자하문 - 세검정 골짜기까지 원정하였다.
우리들은 집이 전부 돈암동과 안암동이어서 세검정 골짜기까지 내려가는 일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귀가하는 길이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차표나 버스표 살돈으로 능금과 자두를 먹으러 자하문으로 갔다. 자하문 고개에 막 올라 오른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자연스러운 비탈에 과수원이 전개되었다.
능금과 자두.
우리를 반겨주던 오두막집 주인아저씨는 돈에 관계없이 마음껏 먹게 하셨다. 덤으로 까치나 비둘기가 찍은 것, 떨어져 깨진 것, 껍질이 상한 것 등을 주셨다. 점심은 굶어도 좋았다. 북악산 서쪽 끝자락을 넘나들면서 늘 인왕산도 올려다보았다.

백악산을 맴돌던 중학생
중1 때 평균점수가 60점대에서 성적을 올려 중3 때는 80점대를 넘어 학교생활에도 재미있어갔다.
원예반에 들어 천안농고의 국화재배장과 온실에까지 방문하고, 생물반에 들어서는 성북동 골짜기, 아리랑고개, 정능 골짜기 등을 돌며 식물채집과 곤충채집하면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일명 북악산 밑에는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이승만대통령관저가 있어서 일반 백성은 접근할 수 없는 산이었다.
물놀이라거나 한강백사장현 제1한강대교 상류 북측 강변이나 뚝섬 유원지 등 물놀이라거나 수영장없어진 서울운동장 축구장옆에 있었던데는 어른거리지도 못하게 하신 가친의 통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악산 주변을 맴돌게 됐다. 중3 때는 생물반 가야산 새물채집과 계류온도 측정행사에 참여했다. 정상에 올라 성주를 내려다보기도 했고 하산해서는 팔만대장경도 만져봤다. 20여 년 전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 영인본을 구입한 것도 우연은 아닌 성 싶다.

백악산에서 지리산으로 그리고 도봉산에서
중학교 3년 동안 통학길은 혜화문동소문 고개였다.
고1 1학기 말경 병마로 어머님께서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를 맞았다. 여름방학이 왔다. 아버지를 졸라 원예반 지리산식물분포 조사대에 참여했다.
화엄사 금정암이 베이스였다. 노고단까지 행군했고, 앞 능선 너머 천은사를 왕복했다.
휴식하고 있던 내 눈에 비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산악부 등반대의 그 장대한 캐러반, 노고단으로 오르는 능선의 하늘배경에 비친 등반의 역동과 행군, 그 장면은 환상이었고 꿈이었다. 그 파노라마를 보고 결심했다. 그해 추석 성묘, 도봉산에 영면하신 어머님 무덤 앞에 엎드려 윤봉길 의사의 글귀를 가슴에 묻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만 볼 수 있게  책상에 써놓고 보곤 하였다.
丈夫出家生不還 / 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가 집을 떠나 (큰 일을 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인데 ‘어머니, 대학에 못가면 산소에 오지 않겠습니다’였다.
‘나는 대학에 간다. 그리고 산에 가고 등산 한다’는 굳은 결심이었다.
고1 2학기부터는 새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책가방에 넣고 학교를 다녔다. 학령 전 남동생과 여동생이 발치에 아른 거렸다. 소설도 시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밤잠을 줄이며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Reader’s Digest)를 사서 앞표지부터 뒤표지까지 단어를 찾으며 식견을 넓혔다.

고2 2학기 말에는 혀가 갈라지고 빈혈에 쓸어지기까지 하였다.
공부방 천정에 크게 그린 화학주기율표를 붙여놓고, 화장실에는 영어사전을 걸어 놓고 암송하는 노력을 했다.
백악 기슭의 능금과 자두를 먹던 즐거웠던 추억과 지리산의 그 파노라마를 떠올리면서 밤새워 공부했다.

백악산아 살려다오
동성고3. 4월 19일.
4·19혁명 그날 나는 삐라(내용은 ‘경찰은 학생에게 폭행을 금하라’ ‘민주주의를 지킬 뿐이다!’ ‘무저항주의!’ ‘동성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를 뿌리며 경무대 앞, 효자동 전차종점까지 전진했다.
사격이 콩 볶듯 시작됐다. 바짝 엎드려 전차길 레일과 아스팔트 사이에 코를 박고 ‘공포, 엄포’겠지 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백악산을 배경으로 경찰이 정조준하고 있는 총구가 내 이마에 와 닿을 듯 가깝다. 총을 든 경찰 뒤로는 백악산이 내려보고 있었다. 누구인지 ‘고개 숙엿!’ 했다.
‘백악산아 살려다오’ 빌었다. 순간, 내 앞의 정만이는 등에, 내 옆의 대기는 왼팔에 총을 맞았다. 55년이 지났다. 지금도 나는 그 친구들과 만나 세종대왕 동상 뒤로 보이는 백악산을 바라보곤 한다.

백악산 내력
백악(白嶽), 백악산(白嶽山), 면악(面嶽), 공극산(拱極山), 북악(北嶽), 북악산(北嶽山)은 모두 청와대 뒷산 또는 경복궁 뒷산을 가리키는 산 이름이다.
백악과 면악이란 명칭은《태조실록(太祖實錄)》 조선태조 4(1395)년 9월 9일 조에,《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조선9대 성종 12(1481)년에, 고려 숙종 9(1104) 때부터 불렀던 기록이 있고 《한경지지(漢景識略)》조선 22대 정조(재위1776~ 1800년간)에도 도성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고 했다.
공극산(拱極山)은 조선 중종 32(1537)년 명나라 사신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산과 서쪽이 있는 인왕산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을 때 ‘북쪽을 끼고 있다’는 뜻 공극이라 하여 부친 이름이다. 산 이름, 북악(北嶽) 또는 북악산(北嶽山)은 아무래도 못 마땅하다.
중국에서 동악은 태산이고 서울의 동산은 낙산이다. 공통점은 사람들이 태산이나 낙산은 본명은 그대로 쓴다.
그런데 목멱산이 경복궁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 백악이 그 반대 방향인 북에 있다하여 북악산이라 함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남산은 중국 길림성 연길에도 있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일제강점이후 마구 변해버린 이름을 되살리고 조선시대 도성과 축성개념을 떠올려 북악산이라 불려오던 그 일대 ‘서울 백악산(북악산)일원’를 ‘사적 및 명승 10호’2007년 4월 2일로 지정했다. 백악, 백악산 이름은 제대로 회복시켰다. 참으로 환호할 일이다. 제대로 됐기 때문이다. 

이병태 이병태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