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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속으로의 여행

종교칼럼

홍순관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느릿느릿 노래하는 가객이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세상의 북소리에 발맞추어 살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대중들에게도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그의 노래가 달콤하거나 자극적인 소리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눈이 향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작은 것들이다. 너무 작아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 혹은 사람들이 한사코 외면하려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노래에는 대중들을 숨막힐 듯한 흥분으로 고양시키는 고음이 별로 없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슬픔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 심성을 파괴하거나 메마르게 하는 정서로서의 슬픔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끄는 슬픔이다.

“노을이 물들어 서산에 해지며는/부르던 이 노래도 고향집으로 갈까/이 세월이 가면 고운 노래도/시간에 흩날리어 찾을 수 없게 되오/성모 형 지금이야 우리가 부를 노래/아버지 들려주던 그 노래를 부르오”(<성모 형>). 함께 노래운동을 하던 성모 형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허감과 그리움을 이렇듯 가만히 읊조리는 그를 떠올려보라.

그의 노래는 아픔이 있는 자리, 아파하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울려퍼진다. 그는 상처받은 이들의 눈물을 대신 흘렸고, 그들의 시린 마음을 가만가만 어루만졌고, 그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시대의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고 있다. 그는 서예가이기도 하고, 조소를 전공한 조각가이기도 하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외로움이 배어 있다. 태생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그가 자기 시를 적어 표구한 액자 하나를 보내왔다.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유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씨를 보면서 숨을 고르노라면 영혼의 무질서가 스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액자를 걸 데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려 보지만 비어있는 벽면이 없다.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태준의 말이 그른 게 없다.

“뉘 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壁面)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이태준, <무서록>, 범우사, 범우문고 109, 2013년 1월 15일, p.15)

이런 벽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햇빛이 고요하게 비껴드는 벽면, 그 텅 빈 벽면에 좋아하는 그림이나 글씨를 걸어놓고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서양 예배당의 지하공간은 대개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설화석고를 통해 투과된 부드러운 빛이 어두침침한 그 공간을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생각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프랑스 파리 시내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Musee de l’Orangerie)에는 끌로드 모네의 대작 ‘수련’이 걸려 있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가던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그림이다. 타원형의 방 2개의 벽면을 가득 채운 수련이 피어있는 연못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생의 비의를 엿본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아침부터 일몰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수면에 비치는 빛의 미묘한 변화, 그러한 빛이 사물과 맺는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 속에 뭔가 신령한 것이 피어남을 알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대작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순간이 그립다. 홍순관의 노래를 듣고, 그의 글씨를 바라보면서도 동일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처리해야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 속에 시달려서일까? 우리 호흡을 가지런하게 해주는 이들이 더욱 그립다.

앞서 말한 이태준은 자기 수필을 이런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벽이 그립다. 널찍하고 은은한 벽면에 장정 낡은 옛 그림이나 한폭 걸어놓고 그 아래 고요히 앉아보고 싶다. 배광(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리운가 보다”(앞의 책 p.16). 아하, 이제 알겠다. 벽이 그리운 것은 우리 삶에 배광이 없기 때문이구나. 배광이 없는 삶은 깊이가 없는 삶이다. 분주함 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느림’의 미학자들과 사귀는 시간을 확보해야겠다.


김기석 목사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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