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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Relay Essay 제2223번째

지난 5월 3일부터 5월 6일까지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찾아서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 이셨던 김영수 교수님과 그 문하생 5명은 안중근 아카데미 수강생들의 현장답사 일정에 합류하였다. ‘안중근 아카데미’는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과 평화사상을 주제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약 15주간의 강의와 국외 안중근 의사 사적지 답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답사여행에 우리가 합류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대합실 안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열차가 오기를 기다렸고, 열차가 도착하여 오전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가 안의사 앞을 2, 3보 지나갔을 때쯤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몸통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 그중 3발을 명중시켜 사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항일투쟁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중대한 사건이며 이후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정상 이유로 하얼빈에서 안의사 거사 이후 행적 순서대로의 답사가 아니라 역방향 순서대로 여순에서부터 답사를 하였다. 재판을 받았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생을 마감하였던 여순감옥, 매장 추정지인 여순공동묘지,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동계관산을 첫날에 먼저 둘러보았다.

 안의사가 수감되었던 감방과 사형장을 둘러보면서 묵념을 할 때에는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는데, 동행하였던 분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가서야 안 사실인데, 여순감옥에는 안의사 이외에도 단재 신채호선생, 우당 이회영선생께서도 수감되어 순국하셨다고 한다. 안의사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하였는데, 황해도 출신이라 남북한 합의가 있어야 유해발굴작업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며 현재 남북한 관계 경색으로 발굴작업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안의사 유해는 여순공동묘지 어디엔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다른 사형수들 유해와 안의사 유해의 차별점은 다른 사형수들은 사형 집행 후 쪼그려 앉은 자세로 둥근 통속에 넣어 매장하였던 것과 달리 안의사의 유해는 관속에 반듯이 눕혀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일본인들도 안의사를 존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차별점을 말해보면 안의사는 왼손 약지 손가락이 짧다는 것인데, 1909년 2월 7일 안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 12명은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모여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 이른바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그들은 왼손 약지를 자른 뒤 붉은 선혈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대한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세 번째 차별점은, 안의사가 천주교 신자라 십자가를 함께 매장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거사를 행했던 하얼빈 관련 유적지는 사흘째인 5월 5일에 둘러보게 되었다. 하얼빈은 위도가 높은 지역인지라 5월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낮 기온이 10도 이하로 두꺼운 옷으로 무장하여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던 장소인 옛 하얼빈역은 신축공사로 인하여 들어가 보지 못하였지만, 안의사를 추모하며 외부에서 바라본 하얼빈역 내부에는 그날의 총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요청으로 중국 정부가 건립했는데, 중국 철도 당국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옛 하얼빈역을 단계적으로 개축하면서 새로운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역사 내에 확장 건립할 것이라고 밝혔고, 현재 개축공사 중이라 역 바깥으로 임시 이전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귀국하는 날 오전에는 731부대를 마지막으로 답사하였다. 일본군은 전쟁 패망 후 731부대 시설을 폭파하여 세균전연구와 생체실험 흔적을 지우려고 했지만 중국정부가 731부대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당시 일본군의 비인도적 만행을 고발하고 있었다. 필자의 직업이 치과의사 인지라 731부대 생체실험 중에 치과의술과 관련된 실험도 했었는지 궁금했는데, 전시된 장비와 기구를 살펴보던 중 발치 겸자가 있어서 자연스레 눈길이 갔었다.

 하얼빈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짧은 시간을 가졌는데, 김영수 교수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고 “제자들에게 치과 관련 지식은 이미 다 가르쳤고, 이제 가르칠 것은 우리나라 역사의식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한번 와본 곳이지만 제자들을 위하여 다시 왔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몇해 전 대마도를 교수님과 함께 갔을 때 최익현선생이나 덕혜옹주의 자취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구한말의 아픈 역사를 느꼈었고, 이번이 두 번째 해외역사탐방인데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현장에서 직접 보니 그 분의 고뇌와 당시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뼈져리게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조국을 위해 몸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순국을 앞두고, 안중근 의사는 동생인 정근, 공근에게 이렇게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 발굴 작업이 하루빨리 재개되어야하고, 비록 남북한이 갈라져 대치중이지만 언젠가 완전히 하나가 된 조국에 안의사의 유해를 모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지영 서울미소그린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