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성경 공부를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수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모든 연수생들은 일년 가까이 그룹으로 성서 공부를 마치고 연수에 참여했기 때문에 수강생들의 열기는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나는 약 200여 명의 연수생들의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긴장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앞쪽에 앉은 한 중년의 형제는 산만하게 자꾸 창 밖만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강의하는데 무척 분심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도 그 형제는 여전히 창밖을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자꾸 그 형제가 마음에 걸려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그 형제를 가까이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형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제 강의를 더 잘 들으려고 자신의 귀를 저를 향해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마치 딴청을 피우는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내가 오히려 그 형제를 잘 보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잠시나마 그 형제에게 안 좋은 감정이 들었던 것에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형제는 다른 맹인들과 함께 점자로 1년 동안 성서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봉사자가 읽어 주는 성서 말씀을 듣고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 저는 나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이 최근에 영화화 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세계의 반응도 무척 뜨겁다. 러시아 정교회의 알렉시 2세 총대주교는 영화 ‘다빈치코드"의 상영은 유럽 기독교의 뿌리가 약화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영화 다빈치코드는 자유수호라는 명분으로 전통적 도덕규범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로 인해 권위를 잃은 그리스도교가 현대인들이 느끼는 위협에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시시하다는 사람부터 믿음이 흔들린다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소설의 내용은 인간 예수를 로마 제국과 교회가 하느님의 아들로 신격화시키고, 가톨릭교회는 수세기를 거쳐 오면서 예수의 자손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반응을 보인다.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있어. 정말 말도 안돼…”라며 아예 무시하는 부류 , “정말 그런가? 내가 믿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조작된 이야기…”라며 신앙의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설왕설래하는 가운데 금년 5월에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동시에 개봉되었다. 영화를 본 사람의 반응도
우리나라 치과계의 임프란트에 대한 열기는 너무 뜨거워, 웬만해서는 기세가 꺾일 것 같지 않다. 임프란트는 한국 치과계에서 가장 촉망 받고 사랑을 독차지하는 치과계의 ‘맏형’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기세가 꺾이면 치과 임상가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질 정도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에는 항상 귀를 쫑긋하고 긴장하면서 강의를 듣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말 강의를 들으니 반갑기 그지 없고,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오는 강의내용을 통해 아직도 필자 자신이 부족하고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끼며 배울 점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도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필자는 여러 연수회와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 현재 우리나라 임프란트 강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배우는 중이다. 과거의 컨셉 중심의 강의에서,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live surgery show로 발전, 프리젠테이션은 더욱 세련되고 파워풀한 강연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필자는 근래에 접한 몇몇 live surgery show에서 배울 점을 발견하고, 이 지면을 통해 몇 가지 느낀 점들을 나누고자 한다. 첫째, 상악 중절치 발치 후 임
사람은 누구나 항상 포근함을 느낄 수 있는 보금자리(잠언27,8)와 자기 사생활을 보호하여 주는 지붕(집회29,21)을 갈망한다. 집을 짓는다는 건 담장을 쌓아 올린다는 뜻만이 아니고 한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낳아서 그에게 교육을 베풀고 덕의 모범을 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가정을 위해서는 지혜와 덕 있는 아내가 있어야 하고 아무도 그녀를 대신할 수 없다.(잠언31,10-31). 그 뿐 아니라 이것은 하느님의 업적으로써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가정의 필수 요건은 무엇일까? 가정의 기초요소는 행복한 부부관계이다. 남편과 아내는 혼인의 계약으로 둘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다. 남편은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에페5,25-33) 가정에서 부부 사이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사람은 어디서도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정은 아직 완성된 가정이 아니며 완성을 향한 여정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들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서에서는 남편이 머리라면 아내는 머리를 받들고 있는 몸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고 경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인도의 영원한 지도자 간디(1869∼1948)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남긴 유명한 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온갖 인종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간디는 우연히 성서를 읽고 참으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였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 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청했지만 어느 교회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간디의 이 날카로운 비판은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게 유효한 말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서 자신의 종교에 해를 끼칩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잘 모르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들 종교인들이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종교인이라면 늘 심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사람들은 대개 행복을 위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행복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들이 다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행복한 삶의 조건으로 오복을 꼽았습니다. 오래 사는 것, 넉넉하게 사는 것, 건강하게 탈 없이 무난하게 사는 것, 덕을 좋아하여 수양하며 사는 것, 그리고 편안하게 죽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대개 ‘행복’이라는 개념을 ‘소유’의 양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즉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행복을 따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역시 많이 소유하면 많은 것을 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것이 심리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본래 유다인들은 가난한 자를 싫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할 때 그들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하느님
<1449호에 이어> 보건의료정보화와 동시에 열악한 의료기관들의 경영조건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리고 정보화에 따르는 비용의 부담률도 쟁점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크다.또한 정보의 공유로 인하여 먼저 진료를 담당했던 의료진의 방사선검사나 병리검사, 그리고 진단과 치료가 합리적이었는지, 검사과정이나 투약 등이 부족하거나 과다하지는 않았는지 등 진료정보의 노출 역시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이와 같은 진료 권리의 보호도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즉 의료법에 명시된 대로 의료인의 의료행위는 누구에 의해서도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하지 않은 한 가지는 개인건강정보의 유출에 대한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환자의 모든 병력이나 가족력, 유전정보까지도 유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일반적인 개인정보의 누출은 경제적인 문제로만 국한되는 경우가 많지만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건강정보가 유출되면 앞서 이야기한 생명보험에 연관된 문제와 같은 경제적인 손실 뿐만 아니라 진학, 취직, 결혼, 심지에 대인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소지가 높아진다. 더구나 정보관리담당자 또는 해킹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잘츠부르크에는 1877년이래 해마다 7∼8월 두 달에 걸쳐 대대적으로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거리의 벽마다 창문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가 붙어 있고, 곳곳에 그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18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명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는 생전에 이 도시에서 겪은 것은 극도의 천대와 무관심이었습니다. 유명한 소설가 존 스타인 백도 “자기가 태어난 고장에서 존경받는 작가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자기 고향에서 냉대를 받게 되자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자렛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자렛의 사람들은 보잘 것 없는 목수에 불과한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자렛 예수가 가문도, 학벌도, 그리고 직업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변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를 조금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 안다는 자부
“지난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된 다음 임의보험 형태를 취한 채 소수의 가입자만으로 지속되던 의료보험은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요구된 의료보장의 필요성에 의하여 사회보험의 한 분야로 채택되어 77년에 486개의 직장의료보험 조합이 설립되고 급여가 시작된 후 89년에는 지역의보까지 확대되었다.…(중략)…이러한 양적팽창과 1만 6000명이 넘는 종사인력, 업무의 방대한 전산화는 개인의료정보의 무분별한 유출이라는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야기했다. 지난해에는 고액소득자 명단이 불법누출,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전국에서 두 번째의 고소득자는 의보조합 직원의 실수로 월 급여에 0을 하나 더 붙인 결과였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있었다. 현행 생명보험 약관을 보면 보험가입을 원하는 사람은 병력을 미리 보험회사에 알려야 하는 고지의무를 진다. 어떤 질환으로 치료받은 경력이 있으면서도 생보사에 알리지 않은 경우는 고지의무 위반으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중략)… 그러나 보험회사의 치료경력 입증은 야속하리만큼 철저하며, 미처 가입 전에 심사숙고하지 못했던 선량한 생명보험 가입자의 병력이 어디로부터 이토록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제공되는지 알 사람은 다 아는
매일같이 거리에서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거리를 마치 자기 집 마당을 치우듯 항상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누가 보든 보지않든지 성실하게 궂은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항상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늘 미소를 머금은 채 땀을 흘리며 일하는 그가 일하는 거리는 항상 깨끗했습니다. 어느날 지나가던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이런 어렵고 궂은 일에 만족하십니까?” 그 청소부는 대답했습니다. “전에는 내 일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늘 불만이었지요.” 그러나 생각을 다르게 갖고부터 나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은 그대로 이지만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청소일이 보잘 것 없는 일이 아니라 더러운 지구의 한 구석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 한 사람의 감동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이며 의사인 슈바이처 박사(1875∼1965)가 아프리카로 떠났을 때는 이미 마흔이 다된 나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편안하고 여유있는 여생을 뿌리치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황하의 신(神)인 하백(河白)이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동해를 바라보며 놀라서 북해의 신인 약(若)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이 황하인줄 알았는데 지금 바다를 보니 더 넓은 것이 있는 것을 깨달았소” 그러자 북해의 신(神)인 약(若)은 “우물 안에서 살고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늘 좁은 장소에 살기 때문입니다. 여름 벌레에게 겨울의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져있거나 식견이 좁은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 믿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우물속에 갇힌 개구리의 모습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성서 여러곳에서 제자들의 몰이해(沒理解)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살았으면서도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같이 살아도 그 사람을 이해하고 아는 것과는 또한 다른 것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