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連休後記

오지연의 Dental In-n-Out

밤이면 환하게 조명이 켜진 메이지 진구 구장이 어스름한 숲속에 불시착한 UFO처럼 동그랗게 내다보이는 숙소여서 이번엔 직접 구장까지 가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진구 구장 외야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가끔씩 날아오는 장타들을 바라보던 어느 날 갑자기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하루키를 흉내 내어 동경에 갈 때마다 가긴 가지만 사실 내게 그런 결심이란 생겨도 고민이고 안 생기면 답답할 뿐, 그저 거기서 야구가 계속된다면 아직 내 속의 무언가가 완전히 막이 내린 것은 아니라는 증거쯤으로 우겨보려는 속셈일 것이다.

하루는 짱구가 뛰어 놀 것 같은 유치원 담벼락에 사람 얼굴만큼이나 커다란 나팔꽃이 가득 피어있는 미나미 아오야마의 골목길을 걷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동경주부들 틈에 끼어 핫케익을 먹었다. 옆 테이블의 수다라 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생각할 것도 없고 단지 좀 시끄러울 뿐이다. ‘난 빠질테다.’ 라는 이 Detachment의 경지야 말로 여행이 주는 묘미겠다. 해야 할 말이라면 분명하게 말하겠지만(Commitment), 굳이 내가 끼어 들 주제가 아니라면 빠져 있겠노라는 입장을 무척이나 나이스하게 표현하는 작가 하루키는 한 강연에서 센카쿠 열도나 독도 등 영토문제는 반드시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고, 실무과제를 넘어 감정의 영역에 진입하는 순간 그것은 출구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고 잘라 말했다. 몰라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겠지만(게다가 그건 더 나쁜 일일 것이고!) 그런 엉뚱한 전개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빈번하기 때문에 삶이 지루하고 힘겨운 건 아닐까. 돌아오자마자 금세 다음 여행을 궁리하게 만드는 여행과 언뜻 비슷비슷해 보이는 글들이건만 번번이 신간을 기다리게 하는 하루키가 내겐 어딘지 모르게 닮아 보인다.

일상이란 논쟁들로 가득하다. 애초엔 그저 각자의 의견일 뿐이었고 서로 폭넓게 주고받으며 상황을 실무적으로 개선시키려던 취지였겠지만, 어느 틈엔가 감정과 승부욕이 뒤섞여 저 므두셀라(969세까지 살았다는)만큼 오래 살아도 끝나지 않는다는 “남의 의견을 반박하려는 논쟁”의 늪으로 빠져들기 일쑤인 것이다. 전문가의 직무적 탁월함이라고 해도 될 집요함과 치열함이 때로 승부욕과 결합된 무서운 뒤통수를 드러내 스스로를 다치게 할 그런 늪으로.

장수가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개미떼처럼 성벽을 공격하게 하여 사졸의 1/3이상을 죽게 만들고 성을 함락시키지도 못하는 것은 재앙이라고 말한 孫子는 非戰, 非攻, 非久를 三非라 하여, 전투 없이 군대를 굴복시키고, 공격 없이 적의 성을 함락시키고, 질질 끌지 말고 적을 무찔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兵法임에도 불필요한 전투와 공격을 경계한 것이다. 특히 질질 끌지 말라는 대목에서는 拙速이라는 대안이 제시되는데, 여기서의 졸속이란 “戰時에는 준비나 절차상의 미비라는 리스크를 껴안더라도 속전속결해야 이롭다”는 뜻이다. 시동 걸린 차는 계속 연료가 소모되듯, 들판의 야전노숙이 길어질수록 무기는 녹슬고 무뎌지며 병사들은 지치게 되므로 승기를 놓치기 쉽고, 아군이 가급적 온전한 상태로의 승리가 최선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적군인지 非久하고자 하는 아군인지를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평화 시의 졸속은 피해야 하고 모든 절차와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며, 또 가능하다면 긴급 시 졸속으로 구동시킬 간소화 방안까지도 강구해 놓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엊그제, 대한치과의사협회 전국시도지부장협의회가 발표한 한 장의 성명서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 30대 치협 회장단 선거 무효소송에 관련된 원고와 피고 모두 치과계의 발전을 추구하는 선량한 치과의사임을 인정한다고 밝히며 현 상황의 원만한 “실무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가슴을 찡하게 하며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단체에 관련된 또 다른 기사가 무척 기다려지는 이 심정은 그저 연휴의 여행 탓일까, 아니면 하루키나 손자병법이 생각나서일까.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