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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치과의사로소이다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20(끝)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 ‘꽃’은 이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DENTIST는 근대 치의학의 아버지라고 칭송되는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 1678~1761)에 의해 1728년에 출판된 ‘Le Chirurgien Dentiste’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포샤르가 ‘DENTIST’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일(job)에 지나지 않았다. 포샤르가 ‘DENTIST’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로 와서 직업(profession)이 되었다. 포샤르는 치과계에 이름, 직업, 윤리와 학문을 선사하였으니 치과의사로서 포샤르의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의사의 출발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로부터 시작되고, 간호사는 나이팅게일의 희생정신을 되새기면서 첫 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 치과의사의 시작은 어떠한가? 학교마다 차이는 있지만 본과 3학년 때 가운을 매개로 하여 저마다의 다짐을 하며, 예비 치과의사 선서식을 하는 학교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과의사의 출발선에는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게일과 같은 사람이 없다. 치과계의 또 하나의 가족인 치과위생사 선서식에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진다. 치과의사에게는 피에르 포샤르, 치과위생사에게는 알프레도 폰즈(Alfred Fones, 1869-1938)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있다. 우리가 포샤르 이름은 잠시 잊었을지라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문직업인 치과의사로서 출발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어느 덧 처음에 약속했던 20번째 마지막 원고다. ‘그림으로 배우는 치과의사학’이라는 칼럼덕분에 2017년을 나름 바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크다. 이러한 기회를 준 치의신보 관계자와 필자의 졸필을 애독해주신 분들에게 지면으로라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돌이켜보니 20개의 제목 중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DENTIST(치과의사)이다. 치과의 운명은 환자도 직원도 아닌 치과의사가 결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DENTIST안에서 치과의사의 마음가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사색을 통해서 채굴한 가상의 DENTIST상(像)과 마지막 그림 몇 장을 소개한다.
   
D : Decisive(결단력 있는), Dedicated(헌신적인)
E : Enthusiastic(열렬한), Entertaining(재미있는)
N : Nice(친절한), Neat(깔끔한)
T : Tough(인내심 많은), Trustworthy(신뢰할 수 있는)
I : Interesting(흥미로운), Intelligent(똑똑한)
S : Strong(강인한), Soft(부드러운)
T : Thoughtful(사려깊은), Talented(유능한)

첫 번째 그림은 Georges Eveillard(1879-1965)의 작품 ‘Military Dentist at the American Hospital of St. Nazaire(1918년)’이다(그림1). 생나제르(St. Nazaire)는 지정학적으로 프랑스 서쪽 끝 대서양 근처의 르와르(loire)강 어귀에 있는데 아마도 제1차 대전 때 연합군을 치료한 군인 병원으로 추정된다. 백여 년 전 즈음 사용되었던 유니트 체어와 가운은 별 특이한 사항이 없어 보인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 치과의사들은 악안면 재건 성형 발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이것이 바로 성형외과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이 특별하게 보인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사진기가 있었음에도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두 번째 그림은 알버트 기욤(Albert Guillaume, 1873-1942)의 작품인데 작품명과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그림2). 기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파리의 평화로운 시대에 유명한 풍자만화가로 활동하면서 극장과 광고 포스터 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인물이다. 그림 2는 캔버스가 아닌 엽서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 시기에 엽서는 황금기였고 치의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엽서가 치과에서는 환자에게 통신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치과 업체에서는 제품을 일반인과 치과의사에게 알리는 홍보물이었다. 엽서에 그려진 19세기말 20세기 초와 현재의 치과의사가 진료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세 번째 그림은 Sir John Lavery(1856-1941)의 작품 ‘The Dentist(1929)’이다(그림3). 자화상 화가로 유명한 존 래버리 경이 자신의 부인이 치과의사 콘래드 아크너(Conrad Ackner)의 진료실에서 치료받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에서 20세기 초에 사용된 방사선 기계와 치과의사가 착용하고 있는 헤드램프가 인상적이다. 2011년 영국치과의사협회는 ‘The Dentist(1929)’를 60,000파운드에 구입하였고 현재는 영국치과의사협회 치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3의 모델인 치과의사 콘래드 아크너는 1912년 영국에서 치과의사면허를 취득하였고 1913년 영국의 의사 면허관리기구인 ‘GMC(General Medical Council)’에 등록을 하였다. 치과의사 콘래드에게는 작가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 1867-1933)와 노르웨이 국왕 등 소위 말하는 VIP 환자들이 꽤 많이 있었다. 자신이 모델로 그려진 존 래버리의 작품 ‘The Dentist(1929)’가 그 당시 꽤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콘래드는 그림의 카피 품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제작하여 달력과 함께 환자들에게 선물하였다. 그러나 GMC는 이러한 콘래드의 행위를 광고로 간주하였고 그를 윤리위원회에 회부하였다. 현재의 잣대로 콘래드의 치과 광고를 잰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엄격한 법 집행인지 아니면 강력한 단체(GMC)의 힘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정의롭고 권위가 있는 영국의 GMC와 같은 단체가 하루빨리 생긴다면 치과의사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광고는 바로 소멸될 것으로 생각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권 훈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미래아동치과의원 원장
대한치과의사학회 정책이사
2540g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