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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문제 너머에

기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서울 8학군의 학교였는데도 학급에 육성회비를 못 내는 아이들이 있었고 학교에서 봄이나 여름에는 쌀, 겨울에는 성금을 모아 전달하던 풍습같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먹고 사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먹고 사는 문제를 뛰어 넘으려고 전 국민이 부단히도 애를 썼습니다. 수위권 학생들은 수능시험에서 전국 1등을 하면 의대가 아니라 자연대 물리학과에 가서 나라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나라가 갑자기 부도를 맞자 전 국민이 결혼반지, 돌반지 등 추억이 깃든 금을 꺼내 모아 나라 빚을 갚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때보다 조금 부유해진 우리,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뛰어 넘었는지요.

제가 보기에 우리는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 갇혀 있습니다. 조금 부유해졌을 뿐, 이제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를 고민할 뿐,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차를 타고 큰 집을 가질까, 어떻게 하면 수익형 부동산을 가질까… 어떻게 보면 저차원적이라 할 수 있는 문제에 사로잡혀 일생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흔에 접어든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 실직하신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대신 학습지를 팔러 나가시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습니다. 성장기에 이미 공무원이 되거나 전문직을 가져야겠다, 학비가 싼 국립대에 가야겠다, 재수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시를 준비했었습니다. 요즘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제 또래에는 그런 이유로 의사가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게 장래희망을 제한했던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언젠가는 먹고 사는 문제의 틀을 벗어나 그 동안 꾸지 못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 너머에 우리가 정말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 있음을 느낍니다. 부유해지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 일 너머에 일생을 들여 해야 할 당연한 일, 더 좋은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구조를 정돈하는 일, 젊은 세대들이 마음껏 사랑하고 부담없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일, 우리나라의 공대생도 선진국 학생들처럼 학부 때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일… 이런 일이 과연 돈이 많아지면 다 할 수 있는 일인지요.

오히려 우리가 가난할 때, 먹고 사는 일 너머의 일들을 더 열심히 꿈꾸지 않았던가요. 내가 부유해지고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일 만큼이나 이웃의 고통에 관심이 있었고, 치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진료소를 지었고, 가난했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과학자를 꿈꾸며 인류 문명의 혁신에 도전하였습니다.

그 때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달랐던 걸까요. 무엇이 달랐길래 먹고 살기도 어려우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걸까요. 그 때의 동력을 우리는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요. 우리가 꾸었던 먹고 사는 문제 너머의 꿈은 지금 이 나라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요.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곽재혁 좋은이웃치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