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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준 원장 올해의 수필상 선정

2008년 이어 두 번째 수상 영예

박래준 원장(비타민치과의원)이 본지가 주관하는 ‘2020 올해의 수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 원장은 본지 2821호(2020년 9월 21일자)에 ‘뫼비우스의 띠 : 아들이 치과의사’라는 제목으로 2414번째 수필을 게재, 50여 편의 경쟁 작품 중 수상작으로 최종 선정됐다.


특히 박 원장은 지난 2008년 ‘엄마표 칼국시’(2008년 2월 25일자 게재)라는 글로 이미 한 차례 올해의 수필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음에도 뛰어난 필력으로 두 번째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수필게재 및 수상 소감 본지 29면 참조>.


올해 수상작인 ‘뫼비우스의 띠 : 아들이 치과의사’는 원내생 스케일링 실습부터 아버지의 주치의가 된 막내아들, 치과의사인 필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이어질 당신에 대한 치과 진료의 순간을, 아버지를 향한 가없는 사랑과 존경으로 치환해 서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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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소감>

9년만의 기고, 세월 다잡은 글의 힘


2008년 ‘엄마표 칼국수’와 2011년 ‘뼈국’으로 수필을 기고하고 9년 만에 다시 기고할 정도로, 이렇게나 바쁘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습니다. 아쉽게도 그 바쁜 세월은 부모님도 비껴가진 못하셨습니다. 더불어 나이 들어가는 저 자신도 부모님과 사랑, 추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 자투리 시간에 핸드폰 자판을 두드려 보았습니다.


저 또한 부모님과 관련된 이 글들을 적으면서, 다시 오질 않은 회색빛 시절들 이야기가 점점 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각인되고 마음 속엔 따스해지는 감동을 느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수만 명의 독자를 둔 치의신보가 있어 수줍고 개인적인 글이었지만, 치과인의 관점에서 열린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리라, 마음 놓고 기고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의 훌륭하고 수준 높은 글들도 잘 감상하였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수줍던 수필에 ‘올해의 수필’이라는 영광을 주셔서, 한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모든 치의신보 독자 분들과 저의 글이 활자화되어 치의신보에 실리기까지 수고해 주신 치의신보 관계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20년도 ‘코로나’ 라는 특수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고군분투하는 대한민국 모든 치과계에 경의를 표하며, 2021년도에는 코로나를 극복하고, 더욱 건강하고 더욱 행복한 한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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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뫼비우스의 띠 : 아들이 치과의사
Relay Essay 제2414번째(9월 21일자 게재)

 

임플란트가 꽤 많은 저희 치과 환자의 파노라마입니다. 지금껏 한번도 결제를 하지 않으신 저의 치과 최고액  장기체납환자(전액 미결제) 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 산업화 시절의 주역. 치과도 없었고, 치과도 잘 안가던 시절이고, 자식들 열심히 키우시고 부모님 봉양하시던 직장인이셨고. 치열하게 자식들 키우시던 시절부터 막내아들 치대 보내고 아들 본과 실습 시작할 때까지, 오직 칫솔질이 치아를 위한 유일한 치료이자 투자이셨겠습니다.


막내아들(92학번) 치대 보내시고, 5년을 기다리시다가 본인의 은퇴(96년도)와 맞물려, 막내 아들 원내생 스케일링 실습부터 본격적인 치과 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치주과 스케일링 실습이후 치주과에서 잇몸치료와 하악 4전치 발치 하셨고, 보철과에서 하악 전치부 6전치 브릿지와 36번 크라운을 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환자삼아 보호자삼아, 진료 보조의 미명하에,  수련의 선생님들의 치료를 모두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아빠는 자식이 다니는 학교 수련의 선생님들께 치료 받으시면서도, 너무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말끔해진 치주치료와 보철치료로, 아빠는 그 시절 세상을 다시 사시는 듯 행복해 하셨고, 치료해 주시던 선생님들을 지금까지 입이 닳도록 칭찬하십니다.


본격적으로 졸업 3년후, 2000년도에는 고향 근처에서 공중보건의를 하는 동안, 아빠는 기꺼이 아들의 첫번째 상악 어태치 부분틀니 환자가 돼주셨습니다. 결혼과 개업으로 서울로 올라온 2001년 이후에는 간간히 틀니가 헐겁다는 소리 정도로 불편함을 얘기하실뿐, 항상 자식이 만들어 드린 틀니로 식사는 잘 하셨습니다. 부분틀니를 잘 쓰시고 계셨지만, 이내 막내아들은 아빠에게 임플란트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사이너스 세미나를 받고, 2006년도에 처음으로 아빠는 기꺼이 나의 첫 sinus graft 환자가 돼주셨습니다. 양쪽 모두, 묵묵히 자식이 시키는대로 아프다는 소리 하나 없으시며, 잘 따라주셨죠. 피멍이 들고 불편하셨겠지만,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마취할때만 쭈뼛 깜짝 놀라셨지, 모든 치료는 묵묵히 잘 참으셨습니다. 자식의 치료이니, 더욱 잘 참아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한 번도 수술 다음날이든, 며칠뒤든 군소리 안하셨어요. 힘들다는 소리도. 항상 ‘괜찮아야~’ 하시며. 부족하고, 못 미더웠을 막내 아들에게 치과 치료만큼은 기꺼이 신뢰를 주셨습니다. 두어번의 암수술과 몇번의 항암치료도 힘들어 하셨지만 잘 참아 내셨듯이.


아마 친구분들한테, 전화나 모임에서 임플란트 후에는 꽤나 자랑 좀 하셨으리라. ‘우리 막둥이가 수술한것인데, 하나도 안 아파야. 우리 막둥이가 대견하대. 치대 보내길 잘했어. 수술 참 잘하대. 우리 막둥이가 한 임플란트 참 짱짱하고 좋구만. 틀니 안쓰니까 참 편해야.’ 하셨으리라.


부족한 실력의 아들 때문인지, 식습관이신지, 이곳을 마무리 하면 다른 곳이 탈이 나고, 탈이나면 다시 임플란트로 수복을 하고. 무한 반복이 시작됐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그것을 빌미로 이따금 서울행을 하셨죠. 덕분에 자식과 손주들에게 먹일 김치랑 고향에서 나온 채소꾸러미를 한 봇다리 싸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당시 고속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시고 아들 사는 노원구까지 여러 짐 봇다리를 미련스레 들고 오시는 모습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연로해지신 두 분은 안타깝게도 이마저도 올라오지 못하시니, 자식과 손주들 먹일 요량으로 여러 봇짐들을 힘들게 들고 오신 수고가 있으셨던 그때가, 그래도 두 분의 행복한 시절이었으리라. 아들집에서 일주일동안 치료를 받으시고, 시골 농삿일이나 모임때문에 다시 내려가고, 한 두어달후  다시 올라오시고가 연중행사였다. 2016년도 미국 연수덕에 아빠의 서울행은 잠정 중지 됐고, 그 이후로 아빠의 기력은 서울행 조차 버거워지셨다. 그 좋던 기억도. 지하철을 타실줄도. 그 좋던 건강도. 자식이 어디서 사는 줄도 모르실 정도.


지금도 엄마는 남은 밥을 누룽지로 만드신다. 두분 식사하시다 남은 밥을 그냥 버리기 아까우시니, 젊은 시절 해드셨던 것처럼 간식마냥 주위에 두시고 입이 심심할 때 드시는 것이겠다. 아빠는 갈비를 드셔도 꼭 골막 있는 것만 챙겨 드시고, 삼겹살도 오돌뼈있는 부위만 드시는 식성까지도 어찌할 순  없나보다. 자식이 치과의사시니 맘껏 드시는 거겠지요. ‘누룽지 같은 딱딱한거 드시지 마세요’는 의미없는 아우성. 자식도 식성을 아빠 닮아 간다.


요근래, 15여년된 30번대 브릿지 빠지신지도 모를 정도로 치매가 심해지셨는지, 불편함을 감추시고 싶으셨는지, 목욕탕에서 때밀어 드릴때, 칫솔질 해드리며 발견후 처남 치과로 의뢰했다. 미국연수 이후로는 자의든 타의든, 이제 광주의 처남이 아빠의 주치의가 됐다. 아쉽게도, 처남 덕분에 그 이후론 나는 아빠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치과 주치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 치아를 생이 끝나는 날까지 책임져 주고 싶은게 자식의 심정 아니겠습니까. 아들이 치과의사니, 최고 혜택을 마지막 순간까지 만끽해 드리고 싶은 거지요. 치과의사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이시니.’


아버지는 자신의 치아를 치대생부터 햇병아리 치과의사 시절의 막둥이에게 맡기셨으며, 기꺼이 어려운 틀니, 임플란트, sinus graft수술의 첫 실험 대상이 돼주셨던 거다. 그 덕분에 미덥지 않던 막둥이는 보통의 치과의사로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 되돌아보니, 저 스스로 치과의사가 된 게 아니었고, 아버지의 희생으로 제대로 치과의사가 돼가고 있었던 거네요.


최장기 최고액 체납 환자라도 좋습니다. 체납액이 무한정 늘어도 좋습니다. 그 체납액으로 ‘퉁치기’에는 아부지가 키워주신 치과의사가 그 빚을 갚기에는 한없이 부족할 듯합니다. 아부지! 편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십시요. 막둥이 아들이 그 빚을 갚을 때까지요. 아들이 치과의사니.


행복한 저작을 위해 오랫동안 잘 버텨온 치조골과 남아있는 몇 안되는 자연치들까지도 모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젠 남아있는 자연치가 많지 않지만,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마냥 치과 치료는 계속됩니다. 모두 임플란트로 교체되고, 그 임플란트가 다시 문제가 생겨도 아빠의 치료는 계속 되겠지요? 아들이 치과의사니.
오늘도 치매 초기를 넘어선 아빠와의 의미없는 통화는 계속되고 녹음된다. 지금 아빠의 무미건조한 통화 목소리조차 하염없이 듣고 싶은 날이 언젠가 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