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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에 대해

Relay Essay 제2472번째

내 어머니!
올해가 탄신 100주년입니다.
돌아가신지도 벌써 38년.

 

1967년 1월 12살 촌스런 단발머리 제주 소녀는 제 몸만한 검은 가방을 등에 지고 제주부두를 떠납니다.
목포 가는 배 안성호에 소녀를 밀어 넣고 부둣가에 서서 당신 딸이 탄 배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걸 손 흔들며 오래도록 지켜봅니다.


배를 타고 난생 처음 혼자 가는 서울 길의 어린 촌년도 눈물을 글썽이며 멀어지는 섬 위의 한라산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봅니다.


3등칸 배 밑창에 다닥다닥 붙어 누워 8시간을 지내고 어둑한 목포항에 도착. 줄지어 호객하는 식당 사람을 따라가서 저녁밥을 먹고 잠시 눈 붙이는 사이 그들이 서울행 완행 야간 열차표를 사다줍니다. 땅을 밟아 멀미의 느낌을 식히고 목포역에서 밤 10시경 출발한 꽉 찬 야간열차엔 입석표를 산 가난한 어린이가 엉덩이 댈 만한 공간도 안 보입니다. 돈을 아껴야 고단한 서울에서 살 수 있다는 제주 어머니의 조냥정신. 절약정신.


통로에 서서 졸며 깨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새벽녘 기적소리와 함께 추운 서울 공기가 얼굴로 훅하고 다가옵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영하의 기온과 어머니를 떠났다는 시린 느낌으로 만난 하얀 증기 가득한 서울역.


내가 앞으로 살아내야 하는 서울은 그렇게 춥게 만납니다.
‘서울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란 소리를 주문처럼 중얼이며 제 몸만한 검은 가방을 짊어진 촌년은 속옷 안쪽에 만든 비밀 돈주머니를 만지고 확인하며 이미 유학온 언니의 자취방을 찾아갑니다.


사투리가 덕지덕지 묻고 남루한 차림새의 제주소녀의 서울살이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나름 촌에서 잘한다고 까불던 아이는 상경해 서울의 중학교 입학시험에 모조리 탈락. 재수로 시작하는 서울 생활은 고달픔과 기죽음과 외로움과 서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서울 아이들의 공부와 실력은 충분히 나를 기죽게 하고 악에 바치게 하며 한편으로 나를 새롭게 부흥시킵니다. 서울로 부친 보리쌀로 지은 밥에 고추장 비벼 먹으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과는 1차 낙방. 결과를 보고 오는 어둑한 저녁 골목길 셋집 담벼락에 기대 울며 다짐합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


12살 어린 아이의 한 품은 눈물은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도 그 담벼락을 떠올리면 울컥합니다. 누구도 어루만지며 위로해주지도 편들어 주지도 못했던 어린 소녀의 가녀린 등짝이 보여서.


그 후 3년 갈 데도 없고 돈도 없으니 컴컴한 문간방 셋집에서 시간밖에 가진 게 없는 아이가 하는 공부를 누가 따라옵니까? 오로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전기 일류여고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학교 담벼락에 붙은 내 이름을 확인하며 또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성취와 보상과 내가 어머니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효도를 드렸다는 그런 자랑스러움에.


겉으로는 내색을 잘 안 하시는 무뚝뚝한 제주 어머니들의 흔한 자존심. 맛있는 반찬을 해 드시지도, 화려한 옷을 입지도, 놀러 다니지도 않고 검소하게 사시며 부지런히 돈을 모읍니다.


구두쇠로 산다고 동네에서 수근댔겠지만 자부심 하나로 모두 이겨내심을 저희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넉넉해서 돈이 많아서 서울 보낸 게 아니라 당신이 못 배운 설움을 씻고 자식들을 제도권 안으로 들이밀려는 집념으로.


비록 남루한 옷을 입고 굶주리더라도 학창시절 형제들 학비를 단 한 번도 밀린 적 없이 납부함은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합니다.

 

그 이후로 모든 시험에서 실패란 내 인생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어머니의 서러움과 고통을 보듬어드린다는 작은 소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 옛날 여자들이 쉽게 가지 않는 치과대학이란 선택도 어머니의 선견지명.
여자도 세상이 무너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제주가 가진 슬픈 역사에서 깨닫습니다.


자격증 시대에 그것이 없어서 평생 고통 속에서 산 아버지. 그에 딸린 가족들의 어려움을 몸소 수십 년 겪으며 결심했을 것이고 그래서 언니도 의사로 남동생 둘도 의사로 키웠습니다.

 

돈 많고 신식 공부한 외할아버지 밑에서 맏딸로 태어나 못 배웠지만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쳤고 어릴적 탕건이란걸 할 때도 악착같이 해서 동네에서 일등. 바느질도 재봉틀도 잘했단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 흘리며 추억할 때 어린 난 이해를 못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어머니 나이가 되고 지나고 보니 그리워 입에만 올려도 눈물 나는 이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12살 시절에 서울로 간 이후 방학 때 며칠 내려갔다 가버리면 어머니는 쓸쓸하고 그립고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내 나이를 살아보시지 못한 어머니. 내가 지나온 어머니 나이에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외로움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이기셨을까?


위로도 선물도 호강도 못 드렸는데 바삐 가셨습니다. 어머니 나이가 지나고 나니 뒤돌아볼 일이 많아집니다. 근데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이, 좋아하시는 색깔이, 노래가, 취미가 있기는 했을까?


후회. 보고픔과 한숨과 눈물이...그래도 자식 잘 된 자부심으로 기쁨으로 사셨기를.
살아계실 때 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