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일)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나의 나이 어린 선배님

Relay Essay 제2474번째

“번개 파워! 발차기~ 얍얍얍!”
이쯤이다. 이쯤에서 꼭 쓰러져줘야 ‘이겼다’하고 탄성이 나온다.

 

3살 딸아이는 유독 꼬마 영웅 놀이를 좋아한다. 본인이 꼬마 영웅이 되면 엄마나 아빠는 괴물이 되어 번개 파워나 발차기에 맞고 쓰러져줘야 놀이가 끝난다. 그런데 요즘에는 종종 엄마에게도 같이 꼬마 영웅이 되자고 제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냉장고나 아빠 옷, 또는 회전의자가 괴물이 되고는 한다. 그렇게 같이 꼬마 영웅이 되어 괴물을 쓰러뜨리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좋아하다가, 어쩐 일인지 갑자기 엄마를 보며 진지하게, 그리고 다소 따끔하게 이렇게 얘기한다.

 

“안돼, 괴물도 우리 친구잖아.”
저도 같이 괴물을 물리친 주제에 꼭 엄마만 나무란다. 괴물도 우리 친구니까 물리쳤다고 좋아하지 말고, 또 이제 괴물을 괴롭히지도 말란다. 아이의 친구에 대한 기준은 참 모호하지만 단호하다.

 

방에서 놀다 어둠이 지면 갖가지 사물이 만들어내는 괴물 그림자가 무서워 엄마에게 달려오다가도, “아, 맞다! 옷걸이 괴물도 우리 친구지?” 하고는 다시 쪼르르 달려가 어둠을 이겨내고 신나게 논다.

 

최근 곤충에 푹 빠진 아이는 어린이집이 끝나면, 아파트 앞 커다란 나무에 집을 지은 엄마 거미와 아기 거미들을 보러 가곤 한다.
“엄마는 거미가 무서워, 거미가 싫어”라고 얘기하면, “아냐, 무섭지 않아. 거미는 내 친구야” 하고 엄마에게 거미를 소개해주며 나를 달랜다. 정작 본인은 내심 겁이 나는 듯, 멀찌감치에서 거미를 보면서도 “가까이 가면 거미가 놀래. 거미는 우리 친구니까 소중히 다뤄줘야 해”라면서 친구를 아껴준다.

 

딸아이에게는 모든 게 다 친구다. 거미도 괴물도, 유령도! 그저 재밌고 신기한 매력 만점의 친구들이다.
나는 이건 징그러워 싫고, 이건 무서워서 싫고, 이건 그냥 싫고…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어떤 사람은 그냥 싫은데. 그런 엄마가 부끄러워지게 만든다.

 

나보다 더 오래 살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인생 선배라고 부른다. 그런데 요 꼬맹이가 요즘 나한테는 인생 선배다.
“이건 엄마가 할 수 없어. 엄마는 좀 더 커야 해” 라거나 “걱정하지 마, 나중에 엄마가 좀 더 크면 내가 사줄 테니까” 또는 “엄마가 키가 나만큼 되면 엄마도 하게 해줄께” 라고 얘기할 때면, 3살 먹은 이 녀석이 그 10배도 더 넘게 산 엄마를 대체 뭐로 보고 이러나 싶다가도, 그 얘기가 ‘엄마는 너무 커버려서, 너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버려서 모르는 게 있어, 엄마가 잊어버린 것들을 내가 알려줄께’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뜨끔해지고 숙연해진다.

 

물론, 아이는 감사하게도 요령 피우는 법도 알려준다. “빨간 젤리는 먹었지만, 파란 젤리는 아직 먹지 않았어” 라며, 젤리를 하나 먹고도 하나 더 얻어먹는 방법이라든가 “낚시 놀이는 내가 정리할 테니, 엄마는 주방 놀이를 정리해” 라며 은근슬쩍 장난감 정리를 떠넘기는 방법 등. 인생 선배들이 꼼수를 알려주듯 그렇게 엄마한테 뻔히 눈에 보이는 요령들을 가르쳐준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가족들 모두 잠든 사이, 창가에 드리워진 어둠이 슬쩍 무서워질 때쯤, 몇 년  전에 봤던 공포 영화 한 장면이 떠올라 으슬거릴 때쯤이면 슬그머니 말해본다. “괜찮아, 괴물도 우리 친구니까.” 인생 선배님이 가르쳐준 대로 친구 만들기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