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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특집> 수도권 치과 집중? 50년 전 ‘라떼’는 더했다

특집: '쉰다섯 살' 치의신보의 '라떼는 말이야'
70년 서울·경기 지역 활동 치과의사 60% 몰려
67년 치협 예산은 357만원, 75년 회비는 7200원

구차할 뜻이 없는 그들의 문장은 간결했다. 치과계가 걸어온 모든 순간이 되새김질하듯 차례로 지면에 올랐다, 내려갔다. 1966년 12월 15일, 치의신보가 세상에 나왔다. 크고 작은 기록과 기억들이 치의신보의 지면을 채우고, 다시 치과의사의 일상을 훑었다. 그들의 일상이 우리에겐 신화가 된다. 그 시절 치과의사들을 웃고, 울리던 치의신보의 흔적들을 창간 55주년을 맞아 오롯이 살펴본다.  <편집자 주>   

 

 

대한치과의사협회의 한 해 살림살이는 얼마나 될까. 2021년 회계연도 일반회계를 기준으로 하면 사업규모가 69억 원가량 된다. 치의신보를 비롯한 특별회계를 포함하면 그 수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시계를 반대로 돌려 50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치의신보가 창간된 이듬해인 1967년의 치협 예산은 357만 7108원이었다.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현재 예산은 대략 1936배가 늘어난 규모다. 기본적인 화폐가치 변동이나 물가상승률은 차치하더라도 그간 치협의 사업이 방대해지고, 역할 또한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는 방증이다. 그 기간 동안 급증한 치과의사 회원들의 수도 이 같은 규모 확대에 일조했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970년에는 580만 4016원, 다시 5년 뒤인 1975년에는 2015만 4222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

 


치의신보 제93호(1975년 3월 31일자) 3면 첫 머리에는 1975년도 예산 통과에 대해 기술한 제24차 치협 대의원정기총회 관련 기사가 얹혀 있다. 총회에서 무수정 통과된 예산액은 기존 회비보다 50% 인상된 금액으로 조정됐다는 내용이다.


특히 이날 인상된 금액 기준으로 보면 당시 치과의사 1인당 회비는 개원의 7200원, 비개원 회원 3600원, 수련의 2400원 등이었다. 개원 여부나 상황에 따라 상당한 차등을 뒀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5년 뒤인 1980년에는 1억 4593만 7422원으로 드디어 치협 예산 규모가 1억 원대에 진입하게 된다. 이때 회비는 개원의 6만원, 비개원의 3만원, 수련의 2만원이었다.


이어 1990년에는 4.4배가량 늘어난 6억 3555만 2611원, 10년 뒤인 2000년에는 24억 1000만원의 예산이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또 2010년에는 51억 2993만 5250원, 2021년에는 69억 2831만 5515원의 예산으로 치협이 수행하는 다양한 사업들의 토양을 마련했다.


#50년 간 활동 치의 13배 늘어나
그 기간 동안 치협에서 활동한 치과의사는 얼마나 늘었을까. 치협 치과의료정책연구원이 최근 발행한 ‘2020 한국치과의료연감’에 실린 ‘대한치과의사협회 활동치과의사 지역별 현황’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치협 활동 치과의사는 1만 9688명이다.


일단 전제를 두자면 해당 자료는 교수, 전공의, 군의관 등 일부 직역의 지역별 통계 미비로 개원의, 봉직의, 공중보건의 수만을 합산한 것이라는 점에서 실제 치협 활동 치과의사 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무소속이나 해외거주 회원들 역시 제외된 자료이니 어느 정도 감안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


딱 50년 전인 1970년에는 1459명이었다. 13배가 조금 넘게 늘어난 수치다. 통계에서는 제외됐지만 당시에는 군에서 활동하는 치과의사들이 큰 규모를 차지했었다. 1970년 기준으로 육군 356명, 해군 35명, 공군 35명 등이 당시 자료에는 잡혀 있다.


1980년에는 2007명, 1990년에는 5963명으로 꾸준히 늘었다. 다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 단위 수가 바뀐다. 2000년에는 1만 1441명, 2010년에는 1만 5535명, 2020년에는 1만 9688명으로 2만 명대에 근접한다.

 

1970년 1459명이던 활동치의 2020년엔 1만9688명

반세기 치의 국시 합격률 ‘롤러코스터’ 주목
최고 100%, 최저 54.59%까지 시대상 반영


지역별 현황을 살펴보면 서울이 1970년 당시 787명으로 가장 많았고, 2020년 기준으로도 4900명으로 가장 많다.


다만 1970년 당시 94명에 불과했던 경기도의 경우 2000년대 들어서며 크게 활동 치과의사 수가 늘어 2020년 현재 4554명으로 서울을 바로 턱 밑까지 추격하는 양상이다.


이어 부산(1511명), 대구(1084명), 경남(1049명), 인천(975명), 경북(770명), 광주(728명) 등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소위 ‘수도권 집중 현상’은 해당 통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20년 현재 기준 서울, 인천 경기 등 3개 지역에는 전체 치협 활동 치과의사의 과반이 넘는 1만 429명(53%)이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50년 전에도 크게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1970년 통계에 잡힌 1459명의 치협 활동 치과의사 중 서울, 경기 지역에 모두 881명의 치과의사가 몰려 무려 60%가 넘는 치과의사가 수도권에 집중됐다.


통계는 70년 그해 제주도의 치협 활동 치과의사 수가 7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80년대 해외치대 유학생 ‘러시’
매년 쏟아져 나오는 700명 대 중반 규모의 신규 치과의사들 역시 내년부터는 이 같은 통계에 포함된다. 최근 10여 년간의 평균 합격률이 대략 94∼97% 정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산정 범위를 과거 50년으로 넓혀보면 시대 흐름과 합격률에 따라 배출되는 치과의사의 수도 롤러코스터와 같이 변동이 심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최고 합격률은 얼마일까. 1970년 이후 국시 합격률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100%인 해가 세 번이나 있었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3년 연속 각각 148명, 161명, 154명의 응시자 전원이 합격하는 기염을 토했다.


견고한 합격률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국시부터였다. 95.16%를 기록, 984명의 치과의사가 탄생한 해당 연도 국시에서는 해외 유학생들이 대거 불합격 되면서 합격률을 낮추는데 영향을 미쳤다.

 


치과의사 국시 합격률은 1991년 54.59%라는 역대급 수치로 폭락, 전체 치과계에 큰 충격을 안긴다. 국시 대거 탈락의 후폭풍은 컸다. 학생 및 학부모들의 집단 반발이 이어졌고, 결국 총 372명의 탈락자들이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사태에 이른다.


1992년에는 91.27%로 90%대 합격률로 복귀했지만 93년(87.41%)과 94년(80.1%)에 이어 95년에는 72.4%로 다시 곤두박질쳤다. 1996년 역시 62.4%로 매우 저조한 합격률을 기록했다. 문제는 국내 대학 출신이 85.9%, 외국치대 출신이 7.5%로 합격률 양극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추세는 2005년까지 지속되다 2006년을 기점으로 외국대학 출신 치과의사의 국가시험 응시율 및 합격인원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치과계의 지속적인 요구에 따라 2006년부터 국시 응시자격을 해외 치과대학 졸업자가 아닌 해당 국가의 면허를 취득한 자로 제한하고 본격적인 예비시험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년 92%를 시작으로 2020년까지는 대체로 90% 중·후반대를 유지하면서 안정세에 들어선 모습이다.


이렇듯 국가시험 합격률 하나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치과계가 온몸으로 버텨온 질곡의 역사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