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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호연지기 - 서울역에 산다는 것

스펙트럼

경기도의 영통이라는 곳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분당으로 이사와 학창시절을 보낸 내가, 3년 전부터 서울역에 살고 있다. 서울 중에서도 “진짜 서울”같은 서울역에 살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지라 아직도 내가 서울특별시 중구에 산다는 게 낯설기만 하다. 서울살이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면 학부 시절 관악에서 3년 정도 산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만하게 “관악은 서울이 아니야”라고 생각하곤 했다. 한강을 건널 때는 “진짜 서울”을 간다면서 들뜬 마음으로 한강 사진을 찍었던 것도 생각난다. 그런 내가 사람이 살 곳이 있는지도 몰랐던 ‘서울역’에 살게 되다니, 그제서야 비로소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살이 3년차, 나는 서울과 사랑에 빠졌다.

 

서울역에 사는 것은 예상보다 재미있다. 삐까뻔쩍한 건물들과 수없는 캐리어들이 익숙해진다. 매일 반찬거리를 사러 들르는 마트에는 외국인들이 더 많고, 종업원들도 영어로 먼저 말을 걸어온다. 내가 서울역을 좋아하는 첫번째 이유다. 말 그대로 “재미”있다.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모든 장면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수없는 변화와 다양성 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나에게도 전달된다.

 

두번째로는 수없는 기차들이다. 서울로7017에 올라가 기차들이 요란하게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있자하면,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든다. 난 이걸 “간접 호연지기”라고 표현하고는 하는데, 웃기는 단어지만 정말로 그렇다. 넓을 호, 그럴 연, 갈 지, 기운 기의 호연지기. 하늘과 땅 사이 가득찬 큰 기운을 말하는 호연지기는 끝없는 바다와 어울리는 말이지만,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보면 그 기운이 느껴지는 듯 하다. 목적지는 모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나도 저 멀리 떠나버린 듯한 자유가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셋째로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빌딩들의 수없는 행렬들과 수많은 직장인들의 바쁜 삶을 보고있자하면, 내 꿈의 경계가 옅어진다. 학교 시험의 학점, 내가 채워야 할 케이스 점수에 시야가 좁아져 있다가도, 그 높은 건물들과 바쁜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리는 미래에 더 큰 가능성을 느낀다. 칙칙폭폭 떠나가는 기차나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미래도 서울을 넘어서서 저 멀리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기도 한다. 그저 “좋은 치과의사”가 내 꿈의 전부가 되지 않게 된다. 더 큰 기회들을 엿보게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그 지역에 익숙해지고 또 익숙해져서 그 규모가 작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서울역은 지낼수록 그 존재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나라의 심장이라는 말이 마음 깊이 와닿아간다고 표현하면 과할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우리나라의 엔진답게, 그 동력이 막연하면서도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그저 그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나에게도 큰 동기를 준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내가 어디서 지내게 될지는 모르겠다. 또 얼마나 예상치 못한 곳이 될지 기대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건, 서울역에서의 이 에너지와 동력은 잊지 못할거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너무 작아지고 시야가 너무 좁아질 땐 서울로7017을 걸어서 남대문 시장을 넘어 시청, 광화문 거리까지 걷곤 한다. 굽이굽이 좁은 골목길에도 활력이 가득하고, 그러다 보면 끝이 안보이는 건물들을 마주하다가, 외국인으로 가득한 호텔과 백화점들이 나타난다. 생기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여행길이 내 출퇴근길이 된다는 것은 밝은 에너지를 준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지하철에 몸을 담아도, 여행와서 들뜬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괜시리 그 즐거움이 전달되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눈에는 안보이지만 거대한 체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만들어진 이 공간은 땅다운 땅을 밟을 수도, 온전한 하늘을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이 곳에서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는 게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삶의 터전이 내 삶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내 공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나 컸던 적이 있나 싶다. 아마도 없는 것 같다. 뉴요커는 저리가라, 나는 서울러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