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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을 버리고 낯설음을 추구할 수 있는 용기

스펙트럼

얼마전에 아내의 생일을 맞아서 그녀가 보고 싶어했던 디즈니의 인어공주 실사판 영화를 극장에서 봤습니다. 인어공주라는 스토리는 애니메이션으로 1988년도에 개발되었고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스토리 보다는 영화를 보고 있는 중에 든 스스로의 생각에 집중하면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에리얼은 익숙한 물 속 세상에서 공주로 편하게 살 수 있지만 그보다는 물 바깥의 인간세상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익숙한 세상에서의 편안함보다는 낯선 세상에서의 호기심이 더 강한 것입니다. 배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파티를 하고 있을 때 가까이 가서 몰래 쳐다보고 있는 장면과 두 다리를 갖고 시장에 갔을 때 그것을 가까이 보는 장면에서 그녀의 즐거움이 잘 느껴집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저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좋아해서 남들이 잘 안가는 북아프리카나 사하라 사막 여행도 해보았고, 혼자 이란이나 두바이도 배낭여행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아주 길게는 못하였기에, 여행책이나 후기에 2주나 한 달이 아닌 3개월 이상의 긴 여행기를 보면서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강렬하게 느꼈었습니다. 이제는 인프라가 잘 갖춰진 선진국 여행을 좀 더 선호합니다. 혼자 시간이 주어진다면 해외보다도 국내에서 비행기값을 아껴서 특급호텔에 쉬면서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안타깝게 그런 기회는 없었습니다.

 

즉 낯설음에 대한 호기심과 호감이 강했던 과거의 저는 사라졌고, 익숙함에 대한 편안함을 선호하는 지금의 저가 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 변화했다는 사실 자체도 잊고 살아가고 있었기에, 영화를 보면서 예전의 내가 생각이 나면서 아련하다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사실 인류든 개인이든 발전을 하려면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가야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문명과 유럽 문명을 만나게 해서 새로운 문화 발전을 이끌었고, 콜럼버스는 지도에 없는 바다로 배를 타고가 신대륙을 발견해서, 대항해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학부에 전공했던 산업공학만을 공부하지 않고 치전원으로 진로를 틀었고, 또 낯선 예방치과를 공부했고, 감사하게도 지금 교수란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낯설은 곳으로 갈 때 피곤함보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기에 거침없이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쉬웠는데, 이제는 피곤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목소리까지 포기하며 익숙하고 안락한 바닷 속 공주의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 지금의 저와 비교해가며 약간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내려면 낯설은 곳으로 모험을 떠날 용기가 필요하다는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영화를 보면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어공주와 같은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여자로서 삶을 거부한 뮬란과 같은 스토리는 디즈니에 많습니다. 실제 현실에서도 흑인에게 부과된 차별이란 익숙함을 당당하게 거부하고 비폭력적으로 평등하게 같이 가자는 낯선 경계로 가서 역사를 바꾼 마틴 루터킹, 익숙한 물리키보드가 달린 스마트폰을 새롭고 낯설게 바꾼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 그리고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한 우주로켓발사를 민간에서 저렴하게 할 수 있다는 낯설고 황당한 믿음을 현실화시킨 일론머스크까지 인류의 모든 진보는 익숙함이 아닌 낯선 것을 추구하는데서 나왔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나온 주인공처럼 꿈을 쫓아 스페인의 평범한 양치기에서 모로코 탕헤르항으로 넘어가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아직 마흔인 저에게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