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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말하기의 어려움

스펙트럼

1. 듣기의 어려움 

 

차를 타고 가족 나들이에 나설 때면, 다섯 살 먹은 우리집 막내 아이는 늘 불평입니다. 자동차 뒷자리에 어린이 세 명이 나란히 앉아있는데 옆자리 누나, 형이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떠드느라 대개 막내 아이의 말이 묻히기 때문입니다. 막내가 아직 어려 누나, 형과 대등하게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막내 녀석이 하는 말 자체가 그다지 영양가 있는 말이 아니기도 합니다. 제 옆자리에 앉은 아내는 뒷자리에서 떠들어 시끄러운 첫째, 둘째 아이를 단속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제가 운전을 하면서도 막내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대꾸해 주지만 어쩌다 놓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내 말도 안 들어 주고~~!!” 그리고 삐쳐서(또는 삐친 척하며) 입이 나오면서 동시에 다물어 버립니다. 하지만 녀석,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디 이제 그럼 우리 막내 이야기 좀 들어볼 까~~?” 하면서 다시 말할 기회를 주면, 쭈뼛쭈뼛 못 이기는 척 하다가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냅니다. “근데요 아빠 저기에 반짝이는 쿵쿵거리는 것이 있지요~~”, “내일 우리 여기에 갔었지요~~”, “전에 내일 밥 먹을거지요~~” 가만히 들어봐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들입니다. 

 

하지만 대꾸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응~ 저기 반짝이는 쿵쿵거리는 거?? 그게 뭐였더라?”, “응~ 전에 우리 거기 갔었다고?”, “응~ 도착하면 바로 밥해서 먹을꺼야~”. 대개는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갈 뿐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의미가 없지만, 대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그런 대화. 아주 순수한 어린이들의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대화 ‘놀이’를 통해 차츰 발달해 가더군요. 첫째 아이도 그랬고, 둘째 아이도 그랬습니다. 아이들의 수준에 기꺼이 맞춰주고 기다려 주는 것은 부모의 몫입니다. 주는 사랑을 할 줄 아는 어른의 몫입니다. 

 

2. 말하기의 어려움 

 

우리집 세 아이들, 한 명 한 명 각자가 둘도 없는 천방지축들이지만 비교적 아빠인 제 말은 잘 듣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 하나, 일단 아빠는 무섭습니다. 야단을 치고 매를 때려서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보여지기에, 아빠는 엄마보다 서열이 더 위입니다. 집안의 절대권력자, 절대자입니다. 모든 사랑과 베품, 안락함과 좋은 것들은 모두 아빠에게서 나옵니다. 그런 아빠가 자기들보다 엄마를 더 좋아합니다. 즉, 어린이들은 왕이 아닐 뿐더러 언제든 엄마에게 밀릴 수(?) 있다는 현실감각. 아이들 눈치는 가히 백단입니다. 

 

아쉬운 사람은 어린이들입니다. 상대방이 아쉬워야 제 말을 들어줍니다. 애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빠는 엄마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아쉬운 사람은 어린이들입니다. 아빠와 엄마는 사랑을 베풀고, 아이들은 베풀어 준 사랑을 받아 자랍니다. 이런 상황은 어른-아이라는 권력의 비대칭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상황입니다. 어른이면서 아이들 밑으로 들어가 아이들을 모시고 사는 부모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끼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말이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일단 그저 좀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면 됩니다. 이것은 두 번째 이유입니다. 다만, 근엄하게 말하되 선택의 여지를 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밥 먹었으니 이제 바로 양치질해라~”(X), “밥 먹었으니 이제 바로 양치질 할래? 좀 있다 할래?”(O) 어른이든 아이든 어떤 일이 상대가 시켜서 즉각 해야 하는 의무로 느껴진다면 재미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반항심도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자발적으로 선택하게 한다면 재미를 느끼고 또 약속을 지키고자 분발하기도 합니다. 물론 여지를 만들어 주고 선택하게 하고 기다려 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대개는 “좀 있다 할래요”라고 합니다. “그럼 5분 후에 하자”라고 약속을 정해 놓고 다시 꼭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네~~” 일단 대답을 했다면 그것은 본인이 한 약속이 된다는 것을 녀석들도 잘 압니다. 아이들은 자기가 대답해서 생긴 약속을 지키고 싶어하더군요. 약속을 지키면 칭찬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잘했어!” 자기 좋으라고 시킨 양치질을 했을 뿐인데, 잘했다고 칭찬을 받다니… 어린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천국에서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기 마련이고, 원하든 원치않든 천국의 문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자신의 인생에 홀로 맞서야 할 진실의 순간이 오기 마련이죠.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로서 듣기, 말하기의 방법 또한 상황과 형편에 맞게 달라져야 하겠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부모-자식 관계가 결코 바뀔 수 없는 위계(hierarchy) 속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3. 듣기, 말하기의 어려움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로서 말하기, 듣기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는 사회에서 만나는 다른 이들과 함께 말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진짜 어려움에 비할 바 못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되려 각자 서로 어른들이기 때문에 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 아이들도 마음대로 안 되는 데 다른 어른들이 결코 제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모두 각자 스스로 지성인이고 또 누가 아쉬운 사람인지 금방 알기도 어렵기 때문에 대화는 산으로 가고 어떠한 합의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이의 말을 들어줄 때 인내심이 필요한 것처럼, 내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잘 이해하기 힘든 그런 상대의 말을 들을 때에는 보다 큰 인내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는 사랑을 넘어서는 져주는 사랑이 요구되기도 한 것 같구요. 져줄 수 있다는 것은 (져줘도 상관 없을만큼) 그만큼 상황과 형편이 더 낫다는 말일 것입니다. 대개 부모가 어린이들에게 져주는 이유는, 져줄 수 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잘 듣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소위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쉬운 입장이면 당연히 상대의 말에 따르게 됩니다. 기꺼이 따라야 하고 온전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대도 어른이고 나도 어른이라면 굳이 상대의 아량을 바라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 입장의 상대를 다그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상대는 또한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황과 형편이 아쉬운 상대라면 그에게 여지를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잘 말하기 또한 정말 어렵습니다. 이 또한 더 나은 상황과 형편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