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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종교칼럼

두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다. 쌍둥이였는데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 태어날 때도 동생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다. 한 태에서 나왔지만 둘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동생은 성격이 차분해서 주로 집에 머물렀다. 늙은 아버지는 맏이가 잡아온 고기에 맛을 들여 그 아이를 사랑하였고, 엄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둘째를 사랑하였다. 형제는 묘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눈도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그래서 맏이에게 어서 나가 사냥을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힘을 내서 그를 마음껏 축복한 후 가야 할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맏이는 즉시 활과 화살통을 메고 들로 나갔다. 부자간의 대화를 엄마가 엿들었다. 엄마는 둘째를 불러 즉시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 염소 고기를 요리해 줄 터이니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고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고지식한 둘째는 두려웠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알아차린다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어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어머니의 계획대로 둘째는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아챈 맏이는 동생을 죽여 한을 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때문에 동생은 고향을 떠나 먼 타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 주목하는 까닭은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했던 그 엄마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맏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광야에 던져져도 너끈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둘째는 제 앞가림조차 못할 것 같은 약자였다. 엄마는 차라리 자기에게 저주가 내린다 해도 그 아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에 나오는 팔조목 가운데 하나인 ‘제가(齊家)’는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뜻이다. 제 분수를 모르고 중뿔나게 튀어나오는 녀석의 기운은 좀 눌러주고, 기를 펴지 못한 채 짓눌린 녀석의 기운은 좀 북돋워주는 게 제가이다. 그래야 둘 다 사람 구실을 할 것이니 말이다.

맏이의 이름은 에서이고 둘째의 이름은 야곱이다. 아버지의 축복이 맺은 결실인가? 저주를 무릅썼던 어머니의 염원이 맺은 결실인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뿌리는 야곱이 네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열 두 아들들이다. 지금도 어머니들의 자녀 사랑은 좀 유별나다. 자기 자식만큼은 남과 구별되도록 키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못할 일이 없다. 문제는 과잉이다. 지나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자녀들이 주체적 존재로 서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성숙해가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생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작은 시련 앞에서도 크게 흔들리게 마련이다. 때로는 사랑이 독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들의 사랑은 더 깊은 곳을 향해야 한다.

조류 인플루엔자가 확산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철새들은 진귀한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다. 대열을 이루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며 알지 못할 그리움에 목메던 날도, 낙조를 배경으로 군무를 벌이는 가창 오리를 바라보며 혼돈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정연한 질서에 경탄하던 것도 어느 좋았던 날의 풍경일 뿐인가? 수많은 가금류가 AI 감염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살처분되고 있다. 끔찍한 일이다. 이 땅 도처에는 무고하게 죽어간 생명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묻혀 있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또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핵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온 세계인들이 절감했는데, 우리나라는 예상되는 전력 소요량을 충당하기 위해 핵발전소를 본래의 계획보다 더 많이 짓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모두가 조금씩 생명과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우리만 유독 뒷걸음질치는 것 같다.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 땅에 우리는 차곡차곡 공포와 혼돈을 채워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이 마음을 잃어 세상은 위험한 곳이 되었다. 후손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심어야 할 것은 생명과 평화, 우정과 연대의 씨앗일 것이다. 죽음의 땅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을 터이니 말이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