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 외곽에 있는 ‘아르메니아인 학살 기념관’을 찾아갔다. 이 나라는 자국의 아픔의 역사를 그 기념관 속에 새겨놓았다. 아르메니아의 근현대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위치가 문제였다. 1877년에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보수적인 무슬림들이 터키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아르메니아인들도 격분해서 대응 폭력에 나섰다. 그러자 당시의 집권 세력인 청년 투르크 당은 자국 내에 있던 지도적 아르메니아인들 253명을 처형했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 법. 1894년에 오스만 제국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와중에 2만여 명이 희생당했다. 수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오스만 투르크와 러시아가 다시 격돌했다. 이때는 아르메니아인들 다수가 러시아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자국 내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그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강
아침 출근길에 종종 마주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과는 눈인사를 나누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헤어 스타일이 남달라 눈에 띄던 아이가 있었다. 남학생인 데도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어 인상적이었는데, 그 아이가 자라 이제는 의젓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 학생과 마주칠 때마다 세월이 그렇듯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곁을 지나치며 학생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린다. “저 학생의 가슴에 하늘의 따뜻한 기운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언덕 위에 있는 학교 후문에 마치 풍경처럼 서 계신 분이 있다. 처음에는 선생님인 줄 알았지만, 그는 학생들의 안전한 등교를 돕기 위해 자원봉사하는 분이었다. 그는 벌써 여러 해 째 그 자리에 서 있다. 처음부터 눈인사라도 나눴더라면 좋았을 것을, 매일 마주칠 때마다 괜히 무안해져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쩍 눈길을 피하곤 한다. 소심한 내 성격을 탓할 수밖에 없다. 괜히 빚진 마음이어서 어느 날부터인지 그분의 모습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화살기도를 날린다. “저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부디 건강 잃지 않게 지켜주십시오.”아침마다 집을 나서 하루 종일 공원을 산책하는 아주머니도 가끔 마주친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포로들이 수용소를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탈출이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둘째는 자살이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이런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수용소이다. 하지만 죽어서라도 수용소를 벗어나는 것이 차역스런 삶을 견디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셋째는 상상력의 힘을 비는 것이다. 제 아무리 엄격한 감시자들도 상상력만은 통제할 수 없었다. 상상을 통해 그는 주로 집에 있는 자기를 떠올리곤 했다. 치과 의자에 기대 앉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애쓴다. 이제 잠시 후면 벌어질 일을 가급적이면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이다.‘나는 지금 독일의 소도시 아이제나허에 있는 바흐의 생가에 와 있다. 뒤뜰이 아름다웠던 그 집.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 건물 2층에는 참 멋진 의자가 있었지. 소라 껍질을 연상시키는 빨간색 의자, 그네처럼 앞뒤로 조금씩 움직일 수도 있던, 세상에 그렇게 멋진 의자가 또 있을까. 그 의자에 앉아 듣던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참 장중했지. 장엄한 오르겔 연주를 듣는 순간 왠지 비현실적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두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다. 쌍둥이였는데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 태어날 때도 동생은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었다. 한 태에서 나왔지만 둘의 성격은 아주 달랐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동생은 성격이 차분해서 주로 집에 머물렀다. 늙은 아버지는 맏이가 잡아온 고기에 맛을 들여 그 아이를 사랑하였고, 엄마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둘째를 사랑하였다. 형제는 묘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의 기력이 쇠약해지고 눈도 어두워졌다. 아버지는 그래서 맏이에게 어서 나가 사냥을 해다가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힘을 내서 그를 마음껏 축복한 후 가야 할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맏이는 즉시 활과 화살통을 메고 들로 나갔다. 부자간의 대화를 엄마가 엿들었다. 엄마는 둘째를 불러 즉시 염소 두 마리를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 염소 고기를 요리해 줄 터이니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고 축복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고지식한 둘째는 두려웠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알아차린다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어하는 아들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