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가슴이 떨릴 때 떠나라, 다리가 떨리면 늦다

아빠와 딸, 7년에 거쳐 200일 15개 나라를 함께 여행
흥부자 부녀의 댄싱 위드 파파 - 벨기에

# 우리의 여행은 계속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회사원이 되고 시간을 잃은 후 깨닫게 되었다. 자유로운 시간의 소중함을. 여행 중에서도 아빠와 함께한 여행들이 가장 그리웠다. 참 이상하다. 다시는 안볼 것처럼 다투기도 많이 다퉜는데 말이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지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저 멀리, 그 어떤 중력의 무게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아주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때의 난 겹겹의 가면을 쓰고 만나고 헤어졌던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갈까 말까 우물쭈물, 우유부단 100단의 나에게 아빠가 결정적 한마디를 날렸다.
“결정했으면 뒤도 돌아보지 마. 그리고 아빠는 요즘 유럽이 가고 싶더라.”

# 화가의 붓끝이 감동한 창밖의 풍경들 [아빠 이야기]

4월인데도 파리의 새벽은 춥다. 일찍 나오느라 한인 민박집에서 아침을 먹지 못한 슬기가 못내 아쉬운지 뭔가를 계속 조잘 거리며 입김이 폭폭 품어낸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파리 북역(Gare Du Nord)으로 간다. 북역은 런던, 벨기에, 독일 등 북해에 인접한 국가로 가는 국제선이 출발하는 기차역이다. 고색의 건물이 보는 이를 압도 한다. 하얀색의 타임테이블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서 기차노선과 시간을 알려준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가는 시대에 아날로그는 정겨움과 함께 소박한 기분 좋음을 선물해 준다.

슬기가 인포센터에서 유레일패스 사용등록을 하는 동안, 역구내의 작은 편의점에서 슬기가 가르쳐 준 프랑스 말로 크로아상과 커피한 잔을 사는데 성공한 나는 괜히 기분이 좋다. 구석진 벤치에 앉아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며, 오래된 도시가 토해내는 알싸한 새벽내음을 함께 음미한다. 오늘은 고속열차 테제베를 타고 벨기에를 당일치기로 갔다 올 생각에 마음이 붕 뜬다. 육로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사르륵 아침 공기를 가르며 기차가 달린다. 차창 밖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파노라마 영상처럼 펼쳐진다. 기차바퀴의 규칙적인 진동에 몸을 맡기며 바람과 빛이 만들어 내는 영상에 빠져들어 간다. 약간의 구릉이 있는 지평선 위로 4월의 건조한 바람은 흰 구름으로 쉴 새 없이 푸른 하늘에 붓질을 해대고, 푸른 벨벳의 밀밭과 노란 유채꽃이 정겨운 조화를 이루며 끝도 없이 펼쳐지는 들판과 약간의 숲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붉은 색 지붕의 집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 띠를 두른 검정색 모자를 쓴 늙은 검표원이 가끔씩 킁킁 콧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 생각하며 앉아 있던 슬기는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있다. 아내의 얼굴을 쏙 빼 닮아 한 손으로도 감싸질만한 조그만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입술에는 가는 금들이 나 있다. 나의 욕심대로 따라다니느라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애연하고 고맙다.

# 본의 아니게 [딸 이야기] 

“슬기야, 한국 가서 와플 가게 해라. 벨기에 와플 와이리 맛있노!”

달달한 향이 도시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수제 초콜릿 가게와 와플 가게 그리고 나무 인형들이 브뤼셀에 온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 마음도 이미 브뤼셀의 포로로 잡힌지 오래다. 초콜릿을 입에 넣지 않아도 향으로 그 맛을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살이 찐다고 72% 카카오 초콜릿만 고집했지만 오늘만큼은 완벽하게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아빠는 내가 이성을 잃고 모든 가게에 들어갔다 초콜릿을 입에 묻히고 나오는 장면들을 고스란히 목격 중이다.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이 가게 저 가게로 뛰어다녔다. 초콜릿의 달달함으로 아드레날린이 춤추기 시작했고 이젠 와플의 달콤함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와플만큼은 한국에서도 맛있다는 가게에 찾아가서 먹을 만큼 좋아하고 나름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벨기에, 이곳의 와플은 어느 가게를 들어가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맛있었다. 아빠와 나는 와플에 올려진 크림이 코에 묻는지도 모르고 벌써 세 개째 입에 넣고 있는 중이다. 너무 맛있어서 입을 벌릴 때마다 만화처럼 입에서 ‘앙앙’, ‘와구와구’ 소리가 났다. 이곳에 온 이상 눈에 보이는 와플은 다 먹고 가야 한다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을 때, 멀어졌던 이성의 끈을 살짝 아빠가 잡아주었다.

“슬기야, 오줌싸게 소년 동상은 보고 가야지.”
“오줌 싸개 소년 동상? 와플 가게마다 앞에 서 있던 그 동상? 우리 많이 봤잖아.”

진짜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정말 작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포즈는 소년을 손가락으로 잡는 포즈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하늘로 올렸다. 아빠가 요리조리 카메라 각도를 바꾸며 손가락 사이로 소년이 들어오게 하려고 노력했다.

“잘 찍었어?”
“응. 잘 잡았어.”
“뭘?”
“소년 꼬치를 딱 잡았어.”
아빠는 이런 유치한 장난을 치고는 좋다고 옆에서 킥킥대며 웃고 있다. 어이가 없는 얼굴을 하니 와플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아빠는 나를 다루는 방법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벨기에 여행  TIP
와플 탐험
버터와 캐러멜의 향미가 진한 둥그스름한 <리에주 와플>, 속이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직사각형 모양의 <브뤼셀 와플>, 두 가지 스타일의 와플 모두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날 수 있다.

추천가게: <The Waffle Factory>,<Los Churros&Waffle>,<Le Funambule>,<Vitalgaufre>

맥주 탐험

국민 1인당 맥주 생산량 1위, 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특색있는 맥주를 생산하는 나라 벨기에. 맥주의 홍수 속에 무엇을 마셔야 할지 모르겠다면, 수도원 맥주 ‘트라피스트(Trappis)’를 추천한다. 트라피스트 인증을 받은 맥주는 세계에서 단 10개. 그 중 6개가 벨기에에 있다.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 베스트말레(Westmalle), 오르발(Orval), 로쉐포르트(Rochefort), 쉬메이(Chimay), 아첼(achel).

추천가게: 2500여종의 맥주를 판매하여 2004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브뤼셀의 데릴리움 카페(Delirium Cafe) 

와플과 맥주를 탐닉하느라 아빠와 나는 놓쳤지만 브뤼셀에 간다면 추천하고 싶은 것 세 가지. 1. 감자튀김 2. 만화를 좋아한다면, 벨기에 만화 센터 3. 르네마그리트를 좋아한다면,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도시 탐험
브뤼셀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를 소개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운하 마을, 브뤼헤 (Brugge). 소설 ‘플란다스의 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루벤스의 ‘성모승천’을 만날 수 있는 곳, 안트베르펜(Antwer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