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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50년 동행(同行)에게

시론

창간 50주년을 맞는 치의신보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치과의사의 친구!

친구는 닮는다… 그것도 50년을 함께 했다면 그 세월의 무늬와 결 대부분이 두 친구 안에 닮은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으리란 점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문득 ‘우리들, 대한민국 치과의사들의 자화상이랄까,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떤 모습이며, 또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새삼스런 질문을 해 본다. ‘국민구강보건향상을 위하여 그 소임을 다하며…’라는 구절이 떠오르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해답으로 이끌기엔 다소 모호하다는 느낌이라, 좀 더 심층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는 단칼에 베는 시원스런 스피드만큼이나 증례마다 나타나는 unpredictability에 대한 유연성이, 첨단의 테크닉인가 여부보다는 재현성 있게 나타나는 신뢰도가 더욱 중요하다. 그 어떤 직업군보다 열정적으로 최신지견과 뉴테크놀로지를 배우고 익히지만, 직접 자기 환자에게 적용할 때는 예외 없이 시간을 두고 예전의 것으로부터 느리고 신중한 전이를 시도한다. 즉 ‘그것이 유형이던 무형이던 시스템의 느린 교체’가 우리들의 전형적인 거동(behavior)패턴인 듯하다. 왜일까? 최신지견에 열광하는 우리들이므로 새로운 것을 과감히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일이 상당부분 'mission critical'(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인 경제적 시간적 손실이 발생하는)한 분야라는 데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분야에서 성공의 핵심요소라면, 술식이나 재료로 이루어지는 어떤 특정 시스템이 최첨단 고성능이어야 한다는 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향후 장기적인 결과에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성과, 유사시의 대처방안이 풍부하게 존재하는 유연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리 치과의사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과 문제들도 잘 이해되고 그 문제들의 해결과정에 관한 합의들도 수렴 내지 도출되기 수월할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상황 초기나 새로운 국면에서 적극적인 의견개진이나 급작스런 방향전환은 가급적 보류하는 것이 치과의사의 보편적 성향이라는 점에 부분적으로라도 공감한다면, 그들의 오랜 친구로 동행하며 지천명(知天命)에 이른 우리 치의신보의 논조와 억양이 우리 치과의사들의 정체성과 닮아 있을 거라는 짐작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친구가 친해질 때와 마찬가지로 멀어질 때 역시 그 계기가 될 수 있는 건 그 닮은 모습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친구에게서 보이는 내 약점이 슬퍼질 때라고나 할까.

1968년 일본에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설국’(雪國,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무용평론가이다. 그는 원래 일본무용에 정통한 자로 그 방면의 평론으로 명성을 누렸지만, 차츰 이러저러한 공격과 질문을 받는 것이 귀찮고(다소간의 두려움도 묘사된 듯하다) 내키지 않아, 갑자기 서양무용으로 자신의 비평주제를 바꿔버린다. 그것도 일본인의 서양무용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접해 볼 방법이 없는 서양인의 춤만을 서양의 인쇄물을 기반으로 쓰기 시작한다. ‘본 적이 없는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한 탁상공론이 없고, 거의 천국의 시에 가깝다…’ 라며 유유자적하던 그였지만 연분이 있던 니가타의 한 여인마저 서양무용을 대하듯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크게 놀란다. 그렇지만 신상이 다소 애매한 여인과의 뒤끝을 염려하여 애써 비현실적인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려 애쓰던 시마무라도 마침내 - 애당초 오직 이 여자를 원하고 있었음에도 여느 때처럼 굳이 먼 길을 빙빙 돌았다고 분명히 깨닫자, 시마무라는 자신이 싫어지는 한편 여자가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고 토로하고 만다.

필자는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대목들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내내 비껴 서 있다가도 이때다 싶게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토로할 줄 아는 용기로운 지성과 솔직한 감성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로구나 감탄하는 것이 결코 필자만은 아닐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친구 치의신보도 항상 믿음직스럽게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으려는 기계적인 균형과 공정함의 테이블을 견지해 주어 늘 고맙지만, 이따금씩 정말 필요한 상황에서라면, 그리고 지천명의 지성과 감성으로 판단이 선다면, 함께 하는 모든 친구들의 마음이 서늘해 질 만큼 아름다운 신랄함으로 상황초기부터 포문을 열어주기도 했으면 하는 바람을 슬며시 전해본다.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오래 함께 하려면 커다란 열정이 필요하고, 그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열렬히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는 상대에게 언제나 공정하고 중립적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비평이란, 사랑과 이해라는 거대한 하늘을 군데군데 편견이라는 구름으로 수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함께한 50년의 동행이 우리를 길 없는 곳에서 벗어나 길 있는 곳으로 함께 나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우리들의 친구 치의신보의 건승을 기원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용호 서울 중구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