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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 깎던 교수님들, 나무 깎는 목수가 되다

[브라보! 마이세컨라이프] ➊ 이승종 연세치대 명예교수, 정진구 원장


‘치과의사는 은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년이 정해져 있지 않고,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진료실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미련 없이 핸드피스를 놓고, 치과의사 김 모원장이 아닌 온전한 자신 그대로를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은퇴가 아니라 인생 3쿼터 혹은 4쿼터를 시작하는 거죠. 본지는 이른바 ‘세컨라이프’를 통해 인생의 빛깔을 다채롭게 수놓고 있는 치과의사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 주>.

 은퇴 후 가평에 작업실 마련 목공 몰두
“치과의사 섬세하고, 공간감 뛰어나 적격”

이승종 연세치대 명예교수는 요새 새로운 직함이 하나 생겼다. ‘목수’ 이승종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한 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학자의 열정을 목공 분야에 온전히 투입하고 있다. 목공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은퇴 전에 선행학습도 했다. |

“은퇴 과정을 스무스(smooth)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퇴임 전에 여러 가지 일을 계획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목공이었는데, 나무의 질감과 목공 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해 6개월 정도 평생교육원에 등록해서 깎고 다듬는 과정을 익혔죠.”

그는 요새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가평군 설악면에 위치한 작업장을 찾아 나무와 씨름한다. 이 작업장은 정진구 원장이 약 15년 전에 터를 잡은 곳으로, 두 목수는 이곳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무 깎는 일에 몰두한다. 사제 관계라기보다 의견을 교환하는 파트너에 가깝다. 정진구 원장은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 보철과에서 교편을 잡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이태원에 정진구치과의원을 개원, 은퇴하고 현재는 오롯이 목공 일에만 시간을 투입하고 있다. 여든이 넘었지만 나무처럼 생기가 넘친다.

“40대 중반에 미국에서 친구가 나무로 된 픽처프레임을 직접 만드는 걸 보고 흥미를 느껴 나무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정규과정을 거치고, 여기에 작업실을 짓고부터는 목공에만 올인했죠. 무슨 거창한 작품을 만든다기보다 그냥 삶을 엔조이하는 겁니다. 그림 그린다고 무슨 피카소가 됩니까? 그냥 즐기는 거지 허허허”

정진구 원장은 기자에게 부메랑 모양의 나무를 건네면서 “이건 캐나다 프린스샬럿아일랜드에 갔을 때 모양이 하도 특이해서 주워온 거예요. 목수는 수석(壽石)이 아니라 수목(壽木)을 하죠”라고 웃었다. 메인 작업장에는 그가 만든 다양한 새집이 전시돼 있다.

이날 두 사람이 의견을 교환해 가며 만든 작품은 ‘스툴’이다. 음악 애호가인 이승종 교수는 “집에서 LP판을 교체할 때 쭈그려 앉아서 하느라 불편했는데, 나무 스툴이 있으면 보기에도 좋고, 판 교체할 때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작업과정에서 소소한 이견이 발생하기도 한다. 편편한 나무에 엉덩이 골을 파야하는데, ‘보철과 출신’의 정진구 원장은 전기톱을 사용해 거칠게 파들어 간 후 다듬기를 권장했지만, ‘보존과’ 출신의 이승종 교수는 전동 샌드페이퍼(사포)를 사용해 처음부터 조금씩 갉아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정진구 원장은 “이 교수는 평생교육원에서 사전 교육도 받았고, 교육용 DVD 예습도 했지만 역시 세밀한 치료를 많이 해서인지 섬세하고, 스킬 늘어가는 속도도 매우 빨라요. 훌륭한 목수가 될 것 같아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승종 교수도 “치과의사와 목공일은 뭘 깎는다는 공통점 외에도 유사점이 매우 많죠. 특히 치과의사는 섬세한 작업에 유리하고, 기계를 잘 다루며 공간감각도 뛰어나다는 점에서 목공일에 잘 맞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라고 평했다. 이승종 교수가 목수로서 궁극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은 ‘손’.

“사람의 손은 얼굴처럼 모두 형태와 결이 다르죠.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 온 이력을 알 수 있어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 노동자의 거친 손, 여인의 고운 손, 치과의사의 손 등 인생이 서려 있는 손을 나무로 한 번 조각해 보고 싶어요. 그게 제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 ‘페이드아웃’하듯 서서히 은퇴하라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면서 두 목수에게 ‘은퇴론’을 물었다. 두 사람의 방법론은 일치했다. 마치 화면이 서서히 다른 장면으로 바뀌듯 ‘페이드아웃’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먼저 정진구 원장의 은퇴론.

“미국에 있을 때 은사가 했던 말이 있어요. life is nothing. 무슨 불교철학 같지만, 치열하게 살다가 막상 물러날 때가 되면 허무하기 그지없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분은 막상 닥쳐서 새로운 걸 하려고 하면 엄두가 안 나니 10년 전부터 서서히 시작하라고 조언했어요. 저도 그렇게 은퇴를 대비했죠.”
갓 은퇴자로 편입(?)한 이승종 교수 역시 비슷하다. “저도 은퇴에 대비해서 재작년 방통대 인문학부에 등록하고 다시 학생처럼 살기도 하고, 몇 년 간 목공을 제대로 공부해 볼 계획을 세워두고 있어요. 하고 싶은 일에 흠뻑 빠져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