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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자 관점으로 살아가자

Relay Essay 제2239번째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으뜸을 달리는 통계수치들이 여러 가지 있다. 반도체 생산량, 철강 산업, 초고속 통신망과 컴퓨터, 스마트폰 보급률, LCD TV 생산, 조선 산업 ….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지만 빛이 밝으면 어둠이 짙듯이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기구인 OECD 회원국 중에서 자살률은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단위 인구 당 성형수술 비율에선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린다. 살다가 힘들고 지쳐서 목숨을 끊는 이가 가장 많은 나라.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 키우기가 가장 힘든 나라. 태어난 자기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서구인의 외모를 표준으로 삼아 이목구비를 뜯어 고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000달러에 육박하기에 대부분 먹고 살만할 텐데도 하루하루가 힘든 곳이 지금의 이곳 대한민국이란 말이다.

영국의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에서는 대한민국의 출산율 저하가 이대로 지속되다가는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나라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에서는 결혼을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초혼 시기가 점차 늦어지는 것이 저출산 문제의 원인이라고 분석하면서 청년 세대의 결혼과 출산을 지원하는 다양한 정책을 내놓는다. 또 자살자를 줄이기 위해서 동네 내과에서도 자살예방 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고안된 미봉책일 뿐이다. 우리사회가 이렇게 불행의 나락으로 치달리게 된 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서구적 산업화를 지향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잘못된 ‘비교문화’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연기법(緣起法)이란 것이 있다. 연기란 “모든 것이 의존적으로(緣) 발생한다(起)”는 뜻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불전에서 연기를 공식화 하여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기에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이 멸한다”고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떤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방에 대해 ‘크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방이 원래 큰 것은 아니다. 그 방에 들어갈 때 머릿속에 염두에 두었던 어떤 방과 비교해서, 그 방에 대해 ‘크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 뿐이다. ‘크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염두에 두었던 방은 ‘작은 방’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내가 처음 들어간 그 방이 머릿속에 염두에 두었던 방보다 작을 수도 있다. 똑같은 크기의 방인데도 어떤 크기의 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따라서 ‘큰 방’이 되기도 하고 ‘작은 방’이 되기도 한다. 이를 연기공식에 대입하면 “작은 방이 있기에 큰 방이 있고, 작은 방이 없으면 큰 방이 없다”라고 표현된다. 그 어떤 방이든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크거나 작은 것이 아니다. 한자로 표현하면 비대비소(非大非小), 또는 무대무소(無大無小)다. ‘크다’거나 ‘작다’는 생각의 양극단 모두 옳지 않다는 뜻이다. 어디서 많이 봤던 표현이다. 무생무멸(無生無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비일비이(非一非異)…. 불전 도처에서 발견되는 쌍차(雙遮)의 표현들이다. 그 어떤 방이든 그보다 작은 방에 의존하면 큰 방이 되고 큰 방에 의존하면 작은 방이 된다. 방의 크기는 실체가 없다. 그래서 방의 크기는 공(空)하다. 방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연기하기에 공하다.

예쁨과 못생김, 잘남과 못남, 부유함과 가난함 등 세상만사가 모두 연기한다. 누군가가 예쁘다고 할 때 원래 예쁜 것이 아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예쁘다고 하지만 더 예쁜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그 모습이 평범해진다. 이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미인대회 출전자들이 절감하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잘났다고 할 때 원래 잘난 것이 아니고 누가 부유하다고 할 때 원래 부유한 것이 아니다. 주변의 사람과 비교하여 잘났거나 부유하다는 평가가 발생한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살기 힘들어진 것은 이렇게 나와 남을 비교하고, 내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문화가 어느 결에 우리사회 전반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을 비교하고, 소유물을 비교할 때 누군가는 우쭐해 하고 다른 이는 우울해진다.

물론 비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행위에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비교에 능수능란해야 한다. 가격경쟁, 임금경쟁, 품질경쟁 모두에서 비교 우위를 점해야 상행위에서 승자가 된다. 그리고 상업인들의 물질적 욕망은 우리 사회 전체의 부를 늘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사회에서는 무한 비교, 무한 경쟁이라는 비정한 상행위의 원리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가 그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 행정, 교육, 문화 전반을 오염시키고 있다. 심지어 가수의 노래조차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는 것을 전 국민이 즐긴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무지개 색깔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뛰어난 색인지 고를 수 있겠는가? 부지불식간에 우리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는 습관화 된 비교문화, 체질화 된 비교문화에서 벗어나는 것, 대한민국을 편안하고 행복한 나라로 만드는 열쇠다.

모든 자동차는 두 가지 모습을 갖는다. 하나는 그 차의 밖에서 본 겉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차의 운전석에 앉아서 본 내부의 모습이다. 하나의 자동차인데 그 두 모습은 전혀 다르다. 밖에서 본 모습은 다른 차와 비교가 가능하기에 내 차가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며, 화려해 보이기도 하고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에서 본 내 차의 모습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백미러도 하나고, 기어도 하나며, 핸들도 하나다. 모두 다 유일무이한 절대의 것들이다. 나 역시 이런 두 측면을 갖는다. 밖에서 본 자동차는 객관에 해당한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남들에 비친 나의 모습, 남들과 비교한 나의 직업, 지위 등이다. 안에서 본 자동차는 주관에 해당한다. 이는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세계, 단 하나뿐인 세계다. 객관의 세계에서는 다른 것과의 비교가 일어나기에 대소가 있고 우열이 있지만, 주관의 세계에서 내가 체험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적이다. 내가 나의 삶을 대하는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치 운전석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살아갈 때, 내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다 비교가 불가능한 유일한 것들이기에 열등감도 있을 수 없고, 우월감도 있을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여섯 가지 지각기관 ‘六根’과 여섯 가지 지각대상 ‘六境’으로 구분하셨던 부처님께서 세상을 보셨던 방식이다. 자동차에 들어앉아 핸들을 잡고 세상을 바라보는 운전자 관점이다. 비교를 초월한 절대적 삶이다. 누구나 운전자 관점을 갖고 사는 것, 우리 사회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의 길’이다.

김성철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서울치대 82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