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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의 조화: 철학적 의학의 탄생

고대 그리스에서 의학과 철학-3

지난 번 칼럼이 고대 그리스에서 합리적 의학의 탄생에 관한 것이라면 이번 칼럼은 철학적 의학의 탄생에 관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전집의 저자들은 합리적인 의학을 확립시키려 했을 뿐 아니라, 자연철학의 연구 방법이나 결과를 의학에 적용하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자연철학자들의 우주론에 기초한 의학, 곧 ‘철학적 의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철학적 의학을 했던 이들은 자연철학에서 무엇을 주목해 본 것일까?

자연철학자들은 주로 이 우주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우주를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를 탐구하고 이 요소들에 근거해서 자연의 온갖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인간을 소우주와 같이 생각하는 그들에게 우주의 구성요소는 곧 인체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우주의 구성요소를 알면 인체의 구성요소도 아는 셈이고, 인체의 구성요소를 알면 이 요소들로 질병이나 건강뿐 아니라 인체와 관련된 온갖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철학자의 견해였다. 이런 견해에 영향을 받아 철학적 의학을 하던 이들은 인간의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히포크라테스 전집 가운데는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저술이 있을 정도로 ‘본질(physis)’이 의사들 사이에 중요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이는 자연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arche)’ 혹은 ‘본질(physis)’를 탐구했으며, ‘physis’는 그들이 ‘arche’보다 더 즐겨 썼던 말이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자들은 자연(physis)을 탐구했다고 해서 자연철학자라 불리지만,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은 자연 혹은 우주에서 본질적인 것(physis), 근원적인 것(arche)을 탐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본질적인 것을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ex hou)에서 찾았다. 그러니까 철학적 의학자들이 인간 혹은 인체의 본질을 논할 때, 이는 인체의 궁극적 구성 요소를 문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의 저자는 특히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철학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도 인간(인체)의 구성 요소로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원소들보다는 체액들을 제시함으로써 의학사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체는 그 속에 피와 점액과 황담즙과 흑담즙을 갖고 있으며, 이것들이 인체의 본질(physis)이고, 이것들로 인해 인간은 고통을 겪고 건강을 누린다. 그것들이 서로 힘이나 양에 있어 적도(適度)에 맞는 상태에 있고 최대한 섞이면 인간은 최대한 건강을 누린다. 하지만 이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적거나 더 많거나, 혹은 몸속에서 다른 모든 요소와 혼합되지 못하고 분리되거나 하면 고통을 겪는다.”(<히포크라테스 선집>, 나남, 2011)

이 인용절은 피와 점액과 황담즙 및 흙담즘을 몸의 구성요소로 보고, 이들 대립적 체액들 사이에 적도에 맞는 혹은 균형 잡힌 혼합이 건강을 낳고, 어느 하나가 혼합에서 빠지거나 부족하거나 넘쳐날 때 질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체액설’이다. 이같이 네 체액을 기반으로 해서 질병과 건강을 설명한 이론은 훗날 갈레노스에 의해 수용되고 의학사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외에도 히포크라테스전집 속에는 자연철학의 영향을 보여주는 여러 저술들이 있으며, 이것들 속에서는 인체의 요소들에 대한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보인다. 그밖에 히포크라테스학파에 속하지 않는 의사들 속에서도 인체의 대립적 요소들 사이의 균형과 불균형으로 건강이나 질병을 설명하는 많은 견해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체액설이든 원소설이든, 옛 병인론적 학설은 오늘날 의학에서는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하다. 물론 오늘날은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원소들이나 체액들로 질병이나 건강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체가 여러 대립적인 요소들이나 힘들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여기에 건강이 달려 있다는 옛 견해는 오늘날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설의 토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기백
정암학당 학당장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