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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희미해 질 땐 터치를

오지연의 Dental In-n-Out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에 심한 단계의 치매는 묘사하기 여러 가지로 곤란하여, 중기 무렵이 그 한계라고 한다. T.S.엘리엇이 일찌감치 간파했듯 너무나 사실적인 것에는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일까.

나중엔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해 지고, 개인생활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운영도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에, 가급적 그 발병과 진행을 늦추어야 고령사회의 고단함을 줄일 수 있다고 역설하는 신경과의사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제약회사들이 관련되어 치매관련 위험을 부풀리는 느낌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자, 그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하진 않았지만, 수 만년의 진화과정을 통해 인류가 깨달은 진리가 있다면, 위험 가능성이 클수록 원래보다 과장되게 지각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다음으로 할 일은 해결 혹은 예방법 강구가 되겠다. 지금 아무리 젊은 당신이라 해도 이 해결노력에 동참하는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문제의 일부가 되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타이밍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중증의 치매로 급속히 진행되지 않도록 약물 치료 등이 가능하다는 경도 인지장애 단계란 오래전부터 해 오던 익숙한 일들은 완벽하게 해 내지만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한 기억이 불완전한 상태다. 직업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몸에 익은 기능들은 여전히 능숙하지만, 며칠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주변사람들과의 대화에 혼선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말수가 적어지면서 약간의 우울증도 동반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얘기를 듣다보니 문득 장 석주 시인의 ‘석불’이란 시가 떠올랐다.
“죽산 가는 길목,/ 머리 없는 석불/둘이 서서 비에 젖는다.// 사그막골 두 노인네/ 점심끼니로 찐 감자 두어 개/ 천일염에 찍어 먹고/ 종일 오시는 비나/ 내다본다.” 지난 날, 상대의 마음 속 한복판으로  단번에 훅 치고 들어갈 틈만 노리던 누군가의 가슴을 안타깝게 적셨을 부슬비건만, 이제는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두 사람이 말없이  내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내내 (살짝 프랑스영화에서처럼!) 조용히 내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라는 이 문세의 노래를 사이좋게 듣고 있을 지도 모를 두 사람은 별 말 없이도 충분히 평온한 행복감 속에 있을 테지 짐작하며 퍽 좋아하는 시인데, 다만 소화기도 약해졌을 연로한 분들이 찐 감자라니 치아가 좋지 않아서일까? 등등 프로페셔널 한 추정 까지 해가며 마음에 걸렸었다. 

추정과 함께 시를 소개하자, 신경과 의사양반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대뜸 그 시를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 얘기인 즉 슨, 종일 비나 내다본다는 것은 경미한 우울증이고, 두 노인네만 살고 있다는 것은 독자적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얘기로 볼 수도 있으며, 찐 감자 두어 개로 점심을 때운다는 것은 조리 기능은 완벽하나 필시 찐 감자 등이 소화가 잘 안 되곤 했을 최근 기억을 못 하는 상태, 즉 경도 인지장애 단계로  볼 수 있다며 강의할 때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예라고 어찌나 열을 내던지 (작가를 밝히고 쓰신다면야 그야 얼마든지) 살 테면 사시라고 해 버렸다.

저런 할머니 할아버지로 지내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마음속에 혼자 간직했던 수채화 같은 풍경이, 바로 중증의 치매로 고생하지 않도록 시기를 놓치지 말고 투약과 치료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는 예기치 못했던 깨달음에 얼마간 기운이 빠져 버리는 느낌이었지만, 이젠 치과치료 중에도 일상생활에서도 주위의 장면들을 조금은 더 세심히 살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바라보던 스마트폰  화면이 희미해 질 때 살짝 터치할 사람이 바로 나인 것처럼.

 오 지연(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 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 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