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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라 마음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

오지연의 Dental In-n-Out

 양만춘장군이 들어앉아 지키고 있는 鐵甕안시성이라도 되는 듯 도무지 뚫리지 않는 메탈 크라운을 간신히 제거 한 뒤에 양치하는 환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저 분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입속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던 기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과연 알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어둡고 좁은 동굴과도 같은 곳에서 조준과 포지션을 유지하려 숨도 멈춰가며 그 어떤 보호 장비도 없이 집중했던 작업이었다.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 쉴 this very moment를 내가 얼마나 고대했는지 그는 아마도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재료비는 낼께’라는 험하디 험한 말씀과 함께 아침부터 들이닥친 먼 친척뻘 되는 환자에게 결코 찌푸린 낯을 보이지는 말자는 克己였고, 또 어쩌면 안시성에서 敗退한 뒤 長安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病死한 당태종 꼴이 되진 않겠다는 각오였다. 龍도 아니고 왕은 더더욱 아니지만 작은 상처에도 사뭇 견디기 힘든 ‘거꾸로 솟은 비늘’ 같은 부분이 나라고 없을 리야! 천진난만인지 무신경인지 모를 저 난폭한 재료비 운운에도 결코 평정심을 잃지 않을 때에야 下山할 경지에 이른 거라던 모 선배 말씀이 생각나는 울적한 오전이다.

이런 날엔 진통제 삼아, 막내 동생 같은 내과 병동 주치의들의 애처로운 눈빛에 마음이 약해져 중증의 환자들을 입원실 침대채로 진료실로 불러 가까스로 인상을 뜨고 틀니를 제작하던 옛 생각을 하곤 한다. 자세유지도 호흡조절도 안 되는 중환자는 인상 뜨기부터 고역이다. 언뜻 보기에도 극도로 쇠약해진 근력 탓에 설사 틀니가 완성된들 저작이 가능할까 싶지만 제대로 된 틀니 끼고 밥 한번 먹어 보고 싶다는 환자의 막무가내를 주치의도 나도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 틀니와 가까스로 채득한 인상 등을 가지고 예술의 경지(?)라 할 틀니를 만드는 도중에 그만 遺命을 달리 하시는 분도 물론 있었다.

한 번은 틀니가 완성되어 환자 내려오시라고 병실로 연락했는데 며칠 후 주치의와 보호자만 왔다. 70대 여자 환자가 틀니 완성되기 며칠 전에 돌아가셨더란다. 여러 번 겪어도 매번 마음 아픈 순간이라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들로 보이는 보호자가 완성된 틀니를 달라고 했다. 드릴 수야 있지만 뭣에 쓰시려고? 라는 내게, 틀니가 완성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 것 같았다며, 자기가 간직하고 싶다는 거였다. 표정도 별로 없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게 더 슬펐다.

마음 같아서는 金箔이라도 입힌 케이스에 넣어 주고 싶었지만 그냥 병원로고가 찍힌 케이스에 완성된 틀니를 넣고 대신 겉에 네임 펜으로 환자이름을 꾹꾹 눌러 써서 건네주었다. 부디 잘 간직하시길. 그런데 최근 듣자하니 틀니는 도급계약이라던데 그럼 이 경우 하자보수는 일괄 하도급으로 천국 쪽에? 설명도 납득도 힘든 일들이란 어쩌면 이토록 끝없이 생겨나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관람한 뮤지컬 ‘시스터 액트’ 속 신부님이 말하길, 신은 모든 기도에 거의 응답을 하지만 사람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응답일 땐 못 들은 척 하는 거란다. 맥락이 닿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부터 환자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내 상식과 판단만을 강요할 일은 아니라는 느낌이 종종 들곤 했다. 중환자의 의치제작 역시 대략 그런 입장 탓이었는데, 과연 옳은 일일지 확신까진 없었지만 어쩐지 당시의 나로선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시스터 액트’ 덕분에 오랜만에 들은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라는 이사야 서 축복의 구절처럼 기왕이면 환자가 원하는 바를 실현시켜주고 축원의 합창을 하고 싶다.

바빌론에 잡혀와 애달픈 향수마다 황금빛 날개를 달아 날리던 히브리노예들의 간구들이 비록 각자 표현은 달라도 내용이 같았기에 신은 선명하게 응답했었고, 물론 가끔은 환자의 ‘무섭게 생긴’ 아들 목소리를 빌어 은은하게 대답할 때도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