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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기행

Relay Essay 제2300번째

치과 문인회 회원 10명과 함께 대마도(쓰시마)문학 기행을 다녀왔다. 말이 문학 기행이지 실제 역사 기행이었다. 볼거리 많은 유명 관광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관계있는 유서 깊은 곳을 찾아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싶어 언젠가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여행은 떠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설렘이다.
자유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도 있겠지만 시간에 얽매여 어찌 쉽게 그리되던가. 현충일 끼고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다. 현충일이라 6·25 당시 학도병으로 전사하신 큰 형님을 생각하면 개운치 않은 마음이었다.

서울역 출발 새벽 5시, KTX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새벽 시간이 부담스럽긴 했으나 다행히 큰 딸의 배려로 서울역에 편히 도착했다.



딸의 배웅에 따뜻함을 느끼며 기차에 올랐다. 부산항 여객 터미널에서 대마도행 오션플라워 호에 승선해 2시간 10분 후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이즈하라항은 남쪽에 있고 북쪽에 히타카츠항이 또 있다는 사실도 대마도에서 알게 되었다.
대마도에 관한 사전 지식이라곤 노략질하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세종대왕 시절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했다는 것, 조선 통신사 축하 사절단에 관한 이야기, 비운의 덕혜옹주와 관련된 사적이 있다는 정도였다.

사전 정보 없이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도 여행의 맛이 있다.
이즈하라항에 도착해 첫 날 도보 관광이 시작되었다. 시내로 걷는 바로 이 길이 조선 통신사가 걸었다는 길이란다.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500여명의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걸었다는 길을 걷는 것이다. 도구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의 축하사절이었다. 대마도에서 시작해 도쿄까지 걸었던 축하사절단의 길은 얼마나 힘들고 멀었던가 생각이 앞선다.

초입 왼쪽 시멘트 구조물이 왜구들이 조선 사람들을 납치해 가두어두고 팔기까지 했다는 인신매매의 현장이었다는 여행 가이드의 설명에 움찔해진다.

인도, 차도 구분 없는 길을 도보로 걷는다.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은 깨끗하고 공해가 없다. 대마도는 제주도 반 정도 되는 섬으로 90%가 산이다. 척박한 땅이다 보니 노략질로 연명하며 살았다 한다. 땅이 좁다보니 도로도 좁고, 인도 차도 구별이 없으니 관광객이 도로 주행에 방해하는 것을 싫어하고 관광객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면서 조심하라는 것이 안내자의 주의사항 1호이다.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관광 책자, 관광 지도도 구하기 힘들었다. 시당국에서도 관광에 신경 쓰지 않는 인상이다.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다는 세이산지(西山寺) 숙박지가 멀리 보인다.

대마도 번주의 관사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고려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고 하나 들르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다.

이즈하라성을 중심으로 무사마을, 상인마을, 평민마을들이 엄격히 구별되었다. 무사마을은 집의 형태나 규모가 사무라이 절대 권력을 지금도 느끼게 해준다. 공해가 없어 공기는 쾌적하고 시내 중심을 흐르는 하천 수로의 물이 정말 깨끗하다. 이즈하라 시내 관광초입에 지장보살을 모셔놓은 불상 모형이 눈길을 끈다.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보살이라고 한다.

이즈하라 시청으로 가는 길 코너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잘 단장된 이층 치과의원 건물이 눈에 띈다. 참 평화롭게 보인다. 쾌적한 곳에 자리 잡고 진료하는 치과의사의 행복을 눈에 그려본다. 그 치과의사와 대화라도 한 번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는다.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는 속담이 맞는 듯싶다. 이즈하라 시청벽에 조선통신사 국제 유네스코 등재기념 현수막이 걸려있다. 그걸 기념하는 박물관 신축공사가 섬 땅 덩어리에 비해 큰 규모로 크게 자리 잡고 공사가 한창이다. 매년 8월 조선통신사를 소재로 한 아리랑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즈하라 가네이성(金石城) 유적지에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대마도 번주 다게유키(宗武志)와 강제 정략결혼을 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덕혜옹주 결혼 기념비가 있다. 이왕가 종가 백작 결혼 봉축기념비(李王家 宗家 白爵 結婚 奉祝 記念碑)이다.

이왕가라는 표현에 분노가 느껴진다. 덕혜옹주가 쓰시마 섬에 실제 살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유화 정책으로 낮은 작위인 백작의 지위를 가진 쓰시마섬의 번주와 강제 결혼을 시켰다니 약소 민족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나라 잃은 덕혜옹주의 삶을 뒤로 한 채 다음 관광으로 나섰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였으며 대마도를 기점으로 조선 침공이 시작되었다.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 선봉장에 섰다는 것도 이 섬과 유래가 있다. 당시 쓰시마 도주(島主)는 소요시토시(宗義智)였으며 그의 장인이었다. 팔번궁 신사에 현지처가 모셔져 있다. 나오는 아이를 틀어막을 정도로 혹독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둘째 날은 히타카츠항으로 향하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관광이다. 대절된 버스를 이용하는데 길은 좁고 리아스식 해안처럼 구불구불한 일차선 도로다. 큰 관광버스가 좁은 길에서 반대쪽 차와 만나면 기다리고 비켜주는 답답한 주행이다. 작은 차가 양보하지 않고 버티면 큰 차가 뒤로 물러 양보하는 우리 상식과는 다르다. 도로 곳곳 주택가에는 살구 모양의 비파 열매가 눈길을 끈다. 온통 산이고 산길이다. 섬 전체 90%가 해발 400m내외의 산지이고 계곡들은 곡벽이 심하다. 농경지는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고 화전 경작을 하여 생업을 유지했다고 한다. 산에는 멧돼지가 많았다고 한다. 점심때 먹은 돼지고기 맛이 색다르다 느껴졌는데 이곳 멧돼지가 아니었나 싶다.

과거 멧돼지 퇴치를 담당하는 번사(蕃使)를 두기도 하였다고 한다. 산촌에서는 숯 제조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다. 과거 산림 벌채가 심했으나 조림 사업으로 지금은 울창한 숲이다. 주로 삼나무와 쭉쭉 뻗은 편백나무 숲이다. 일본에서는 스기나무라고 부른다.

해안가에는 어촌 마을이 둘러서 있고 어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아소만 일대는 진주 양식장이 질서정연하게 표주박을 띄우고 있다.

이렇게 열안한 자연환경 때문에 생업이 어려워 조선 해안에 노략질 하는 것이 본업이었고 왜구들의 노략질 본거지가 된 것이다. 고려 말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를 가졌다. 왜구들의 폐해가 심해 이들을 처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

이종무(李宗武)가 대마도를 정벌해 도주의 항복을 받았지만 관리가 어렵고 쓸모없는 땅이라고 생각해 포기한 것으로 우리 땅이 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다.

북쪽으로 가는 도중 만관교 관광을 했다. 러일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인공으로 굴착한 것이다. 중앙부의 아소만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라는 수로에 의해 상하 두 섬으로 나누어진다. 아소만과 연결하는 수로이고 실제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틱 함대를 도고헤이치로가 이 곳에서 무찔러 전쟁 승리의 단초가 되었다. 아소만 앞에 부채꼴 모양의 진을 쳐 러시아 발틱 함대와 대척했는데 뒤쪽에서 이 수로를 이용해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마치 이순신의 학익진을 배운듯하다. 일본 수군 영웅, 도고헤이치로는 이순신을 존경했다고 한다. 자기는 이순신 하사관 정도 밖에 안 된다고 존경했으며 영국 넬슨제독보다 우수한 제독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일본이 청일전쟁이 끝난 후 러일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조정은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으니 일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맑은 날에는 부산을 볼 수 있는 대마도 최북단 한국전망대 관광을 한다. 이곳이 우리나라와 최단 거리로 42,5Km이니 마라톤 풀코스보다 조금 길다. 과거 조오련 선수가 이곳을 헤엄쳐 건넌 적이 있었다. 날씨가 맑게 개였으나 부산 쪽이 뿌옇게 해무가 깔려 볼 수가 없었다. 공해 탓에 요사이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오히려 부산 쪽에서 대마도를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쪽이 공해가 적기 때문이다.

한국 전망대 아래에는 조선역관순난지비(朝鮮譯官殉難之碑)가 있다. 1703년 위문행역관사(慰問行 譯官使) 선박이 대마도로 입항하다 이곳 앞바다에서 암초에 좌초되어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13명 전원이 사망했다. 정사 한천석(韓天錫)을 비롯한 113명의 넋을 기리는 비이다. 규모도 꽤 크고 113명 이름이 모두 새겨진 비(碑) 앞에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도착한 하다키츠항 터미널에서 승선해 1시간 10분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북쪽 항은 갈 때보다 1시간 정도 가까운 거리이다. 화려한 특별한 관광거리가 없어도 많은 여운을 남기는 여행으로 꼭 한번은 가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서 깊은 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지해야 할 땅에 대한 아쉬움과 아까움이 교차하는 것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마음은 개운치 않다.

걷는 길은 그 도시의 얼굴이고 거울이다. 걷다보면 작고 사소한 것이 보이고 흘러온 시간이 보인다. 과거와 현재가 보인다.

변영남
 치과문인회, 성신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