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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875, 나의 dent@

편집인 칼럼

나는 1992년에 ‘최치원치과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 개원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본인 이름을 치과이름으로 정하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해당 분회의 내규가 있기도하였지만 부모님이 주신 소중한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과 내 이름을 걸고 책임감 있는 진료를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했다.

이름은 정했으니 다음으로는 전화번호를 정해야 했다.
가능하면 2875를 나는 받고 싶었으나, 회선이 없다는 전화국 직원에게 통사정 한 선친 덕분에 2875번호를 받아들고 뿌듯한 감정을 가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치과의사를 비롯한 치과계종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번호는 ‘2875’일 것이다.
지금이나 그 때나 우리들이 전화번호를 2875로 받았으면 하고 묘한 집착 아닌 집착을 부리는 이유로 ‘치과’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나의 자긍심과 소속감을 표출하고픈 무의식 속의 생명력(vital sign)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를 해본다.

혹시 2875번호를 부여받지 못한 치과의사들은 2828, 2800, 2275, 2804, 8275 등으로 아쉬움을 달랬지만 모두가 받을 수 없는 번호이기에 2875소유자는 일종의 기싸움에서 손맛을 느낄 수 있었던 우리들만의 이야기이자 주변의 재미거리였다.
왜 2875를 선호하는 것일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이빨치료’를 통해 치과를 연상시켜 환자들의 기억을 잡아두는데 그만한 숫자조합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부동산은 4989, 기차역은 7788, 이사짐센터는 2424, 장례식장은 4444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메일 주소도 그렇다.
치과종사자들의 이메일에는 ‘dent’라는 단어를 조합하여 만드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웹페이지에 아이디등록을 할 때면 중복아이디 검색을 통해 거절당해 본 경험들이 한두번 쯤 갖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전화번호 2875와 이메일주소 dent는, 치과라는 코호트에 속한 우리들의 언어이자 재산인데, 우리들의 언어는 오염되고 우리들의 재산이 잠식당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홈쇼핑이나 대형 회사에서나 사용했던 1588-***, 1688-****, 070-****-**** 등의 수신자부담 전화번호를 치과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이제 바이럴마케팅 선택이 아닌 필수다’라는 제목의 전단지가 치과를 상대로 공격적인 영업을 하고 있다.
홈페이지, 블로그 등을 통한 유료의 ‘바이럴마케팅’ 대행업체 주소가 dent@로 조합된 이메일주소를 대신해가고 있는데도 ‘추세’라는 포장을 씌워 치과의사를 포장해야 한다는 영업전략에 무방비로 우리를 맡기는 것을 ‘추세’로 받아들이는 것에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992년 개원 당시에는 신문 사이에 끼워 개원을 알리는 간지를 1~2번 정도 돌려 홍보하는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아르바이트를 동원해서 지하철 앞에서 물티슈를 돌린다고 보건소에 알려 다투나 싶었는데 이제는 물티슈가 기본이 되어버리고, 바이럴마케팅이 필수인 시대가 되어버리고, 수신자부담전화가 버스와 지하철을 빼곡히 채워나가는 현실은 치과의사를 그 방향으로 이끄는 영업사원들이 영업을 잘한 것이지 치과의사들이 영업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치과의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77조3항 뿐 아니라 2875번호도 사수하여야 한다. 이대로 영업사원들에게 이끌리다가는 영업사원과 대표이사, 사장님, 사무장님 명함엔 2875가,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 치과위생사 명함에는 4989(사고팔고), 3355(삼삼오오), 4545(사요사요)가 새겨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1992년 6월 20일 최치원치과의원 02-***-2875가 들어간 신문 간지를 일간지에 끼워 돌렸다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치과원장님께 혼났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 나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쉰 한살의 중년 치과의사의 푸념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시월의 마지막 밤에….

최치원 공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