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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걷는 것은 세계유산 순례길을 걷는 것"

일본걷기여행① 세계유산 불교 순례길
와카야마현 고야산 초이시미찌(町石道)

 


“아, 정말 좋다!”
초이시미찌(町石道)를 걷는 동호인들의 얼굴에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불교순례길이라고 하여 조금은 따분할 줄 알았는데, 첩첩 산중에 이토록 오롯한 흙길이 놓여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는 눈치다. 일본 와카야마현의 불교순례길인 쵸이시미찌는 그렇게 누구라도 만족할 만한 아름다운 길이다.

쵸이시미찌는 우리나라로 치면 원효대사 정도의 신망을 받는 고보대사 쿠카이(弘法大師, 空海 774~835)가 해발 800m 산중에 만든 불교도시를 산 아랫마을과 잇는 길이다. 이 산중 불교도시의 이름이 고야산(高野山)인데, 서기 810년 개창된 이래 천년 넘게 여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그런 연유로 비구니였던 고보대사의 어머니마저 고야산에 들지 못하고, 산 아래에서 수행을 하였단다. 이때 고보대사가 산 아래의 어머니를 한 달에 여덟 번씩 찾아서 안부를 물었는데, 그때 오가던 길이 지금의 초이시미찌 20km가 된 것이다.

천 년 전의 안부통신망이 순례길이 되고

순례길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우는 전 세계에 두 곳이다. 그중 한곳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고, 다른 하나가 일본 와카야마현에 있는 ‘기이산지와 영지의 참배길’인데, 그중 하나가 초이시미찌이니 이 길을 걷는 것은 곧 세계유산 순례길을 걷는 것이다.

초이시미찌의 시작점은 고보대사의 어머니가 생전에 수행을 했다는 곳에 1,200년 전에 지어진 지손인(慈尊院)이라는 사찰이다. 이 사찰에는 고보대사가 직접 조각했다는 목불이 전해지는데, 4년에 한 번씩만 공개되는 비불로 불당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바로 이곳 지손인부터 초이시미찌를 상징하는 높이 3m 돌기둥인 정석(町石)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 정석은 정확하게 109m 마다 하나씩 180개가 고야산의 중심인 단상가람까지 걷는 이들을 안내한다. 이 돌기둥은 800년 전 초이시미찌가 공식적인 순례길로 인정되면서 귀족들과 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한 기부금으로 20년에 걸쳐 세운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돌기둥은 800년 전 그대로라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20km 정도 되는 초이시미찌는 대부분 아름드리 삼나무가 호위하는 폭 2m 내외의 흙길이다. 세계유산으로 관리되는 길이므로 안내사인도 잘 되어 있고, 노면정비도 잘 되어 있다. 다만 20km를 하루에 다 걸어내기가 쉽지 않기 에 보통은 중후반부인 야타테라는 곳에서부터 아침에 걷기 시작하면, 초이시미찌의 끝인 단상가람을 지나 고보대사가 입적한 오쿠노인에 오후 4시경 도착한다.



일본 최고의 불교성지 고야산, 그리고 오쿠노인

세계유산에 일본 불교성지로 등재된 고야산을 살펴보자. 고야산의 넓이는 우리나라의 조그만 읍면소재지 정도이다. 400년 전 로마 교황청의 자료에 따르면 고야산 산중 불교도시 안에 사찰이 1천 곳에 승려 1만 명이 생활하며 불법을 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100개 넘는 사찰과 1천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불교신앙의 성지로 일본에서 가장 이름이 높다.


현재 있는 사찰 중 52개 사찰이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므로 고야산에 가면 하루는 절에서 묵곤 한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템플스테이와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구속됨이 없다. 저녁과 아침예불도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면 된다. 그저 오래된 사찰에서 숙박을 하고, 사찰음식인 쇼진료리로 저녁과 아침을 먹는다는 느낌이면 틀리지 않는다.

심지어 저녁을 먹다가 술을 주문하면 스님이 맥주나 일본 술을 거리낌 없이 가져다준다. 이런 문화는 일본의 오래된 관습이다. 예로부터 일본은 어느 지역이든 가장 좋은 건물이 사찰이다보니 중요한 손님일수록 사찰에 묵게 했다는 것이다. 즉, 사찰이 그 지역의 중요한 숙박시설로써 기능했고, 그러한 전통이 지금도 전승되는 것이다.



고야산은 고보대사의 어머니 조차 들어올 수 없었던 금녀의 공간이었기에 여인들이 고야산 외곽을 걷는 여인도(女人道)가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이 여인도를 걸으면서 쉬어갈 수 있는 여인당이라는 집들이 여인도를 따라 여섯 곳 있었다는데 19세기 중반부터 여자들도 고야산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면서 그런 집들은 사라졌다. 다만 그 길만은 여전해서 순례객과 걷기여행자들의 발길을 받아내고 있다.



초이시미찌와 여인도의 최종 도착지는 고보대사가 입적한 동굴이 있는 오쿠노인이다. 오쿠노인은 일본 최고의 명당으로 이곳에 묻힌 유해가 대략 50만기 정도다. 고보대사가 입적한 동굴에 가까운 곳일수록 더 좋은 명당으로 치기에 가장 가까운 곳은 일왕가문의 묘가 한국식 봉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고야산의 절반을 자기의 무덤으로 하고 싶었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하여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일본의 유력 가문의 묘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결국 초이시미찌 걷기를 오쿠노인에서 마치고 보니 수백 개의 사찰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묘비가 모두 고보대사의 가피를 바라며 한 곳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고야산의 실제였다. 인간 집단의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무서울 만큼 강고한가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이런 것들을 믿고 실천에 옮기는 일본인들이 어찌 보면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자연재해에 노출되어 무엇엔가 마음을 붙이지 않으면 즐겁게 살아지지 않는 그들이 가엽기도 하다.


윤문기
걷기여행가, 발견이의 도보여행 ‘MyWalking.co.kr’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