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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틂의 미학

Relay Essay 제2193, 2194번째

정상을 비정상으로 바꾸는 것이 비틂이다.

모양을 비틀면 형태가 달라지고 달라진 형태는 망가짐이나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 무엇인가 분명히 달라진 새로운 혁신을 만든다.

일상을 부수며 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한길로 법도를 지키며 윤리를 존중하고 올곧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궤도 이탈로 우리들의 지루한 삶에 신선한 탄력을 부여하는 변화를 갖자는 말일 것이다.

여행을 하는 것은 최고의 비틂의 하나이다. 경험을 통해서 머릿속에 수 많은 그림을 갖게 하고 각양 각색의 세계를 우리들 마음속에 수용케하는 대단한 학습이기 때문이다.

훌훌 털고 일어나 어디론가 출발을 하다보면 목적지에 간다는 선망도 중요하지만 출발전부터 설레임이 있다. 그 설레임부터 여행자의 마음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상황속에서 매 순간의 감흥이 신선한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함으로써 일상을 간단하게 비트는 것이지만 그 여행을 통해서 우리들 영혼의 풍성한 학습은 보이지 않는 재화가 되어 우리들 삶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다.

여행은 설렘으로 시작해서 설렘으로 끝이 난다. 매 순간마다 새롭고 미지에 대한 탐방과 모색과 발견의 수업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비틂을 최고의 목표이자 수단으로 한다. 일상의 연속이나 평범은 지루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술을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 상황이 지속적으로 오래 머물고 계속되는 것은 삭막하다. 무엇인가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한다. 기쁨, 환희, 슬픔, 절망같은 질곡속에서 새로운 전환과 탄생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대개의 예술은 창조를 생명으로 한다. 곧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화가들이 구상이나 비구상의 작품을 그릴 때 번뜩이는 변화를 떠올린다.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모양을 바꾸는 것(Defomation)을 줄여서 defor.라고 말한다. 곧 비틂이다.

바로 이 비틂을 통해서 새로운 창작이 시작되고 창작이 되어 지는 것이다. 대개의 화가들은 defor.를 많이 한다. 사실을 그릴때도 작가 마음대로 사물을 생략하기도 하고 집어 넣기도 하고 키우기도 줄이기도 한다. 작가 마음대로다.

눈에 보이는 자연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사진찍기다. 생명이 없다. 사진을 찍으면 되는 것을 열심히 그릴 필요가 없다. 변화를 부여해서 창작을 하고 그러한 과정속에서 수많은 실망, 좌절, 새로운 탄생, 기쁨 등의 방황이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데는 작가의 수 없는 진통속에서 작가의 고뇌가 작품속에 녹아있기 마련이다. 지우고 부수고 다시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얹히고 또 고치고 다시 또 내 팽겨쳤다가 다시 붓을 잡는 등의 방황을 통한 인고의 흔적들이 모여 작품이 완성된다. 바로 작품속에 작가의 고뇌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하루가 계속되는 일상의 연속은 맥박이 없는 생명이 없는 작품처럼 아무리 잘 정돈되어 있을지언정 맛갈이 없고 탄력이 없다. 의미 부여가 어렵다. 그래서 비틂이 있어야 한다. 변화를 만들고 늘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최고의 가치를 추구한다.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재화, 눈에 보이지 않는 재화가 있다. 경험,학습, 문학, 역사, 철학에도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진리이면서 변하지 않는 일반적 보편적 객관적 가치가 있는가 하면 사람에 따라 그 평가가 다른 주관적 가치가 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는 별것 아닐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정상황을 보고 객관적인 비판을 한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 난 엄청난 사건 사고를 접하고 우리 사회 통념으로 가차없는 비판을 한다. 특정한 상황밖에서 특정 상황안의 절실한 이해없이 그냥 밖에서 보는 잣대로 그 상황을 함부로 매도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사회적 종교적 관습에 저항하고 증오, 질투, 절망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빠진 사건의 주인공이 선택한 마지막 선택의 죽음이 비탄의 대상만이어야 하는가? 사랑의 결핍속에서 어느 체육관조교와 열애에 빠진 어느 여교수의 불륜이 비난만 받아야 하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안나 카레리나’를 보자. 이 소설 여주인공 안나는 러시아 정계의 최고의 정치가인 남편과 호화로운 저택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고루하고 이성적인 남편에게 염증을 느꼈다.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안나는 어느 파티에서 매력적인 외모의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난다. 뜨거운 욕망에 사로잡힌 안나는 브론스키와 위험한 관계로 발전하고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는 결국 안나로 하여금 가정을 버리고 도피하게 되고 마침내 자살이라는 파멸의 길을 걷게 한다. 안나 카레리나는 소설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으로 그녀의 생을 마감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고 그를 갖고 싶었다”는 그녀의 절규는 여러사람에게 또 하나의 깊은 생각을 갖게 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트에프스키가 이 작품을 읽고 거리를 뛰어다니며 “톨스토이는 예술의 신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 그것은 사회통념으로나 직관적 가치 판단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자기 판단의 문제다. 자기 판단에 따라 그 선택의 길을 가고 누리는 것이 그가 갖는 최고의 가치고 최고의 행복이 아닌가 한다.

정상을 비정상으로 만들어서 잘못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을 비틂의 미학이라고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영혼의 갈망에 따른 본인 입장에서는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설도 가능하다.
한때 소설과 영화로 우리들 가슴을 시리게 했던 유명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보자.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감에 젖어있던 가정주부가 남편과 아들이 여행을 떠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중 메디슨카운티의 로스민 다리를 찍기 위해 찾아온 사진작가와 사랑에 빠진다.

이미 중년에 이른 그들은 살아온 시간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절실한 사랑만을 갈구한다.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에 사로 잡힌다. 다른 남자와 열화같은 사랑에 빠졌어도 새 출발을 위해 떠나지 못하고 끝내 가정을 지킨다.

가슴 저리는 사랑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키면서도 그간의 망설임과 결단의 방황은 어떠한것인가?

그녀는 자식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유골을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밑 흘러가는 강물에 뿌리라고 했다. 결국 그녀는 가정을 지킨 그녀의 이성을 저버리고 그녀의 감성이 좇는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보편적이고 정상적이 아닌 격을 깨는 비틂이다. 결국 질서가 정돈되어 있는 평화와 안정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와도 마음을 뒤흔든 영혼을 아프게 하는 가슴 밑바닥의 뜨거운 맥박은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겉에 보이는 정돈된 모습과 이성으로 절제된 외견상의 질서는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 안의 진실은 숨길수 없는 것이다. 진행하는 꿈틀거리는 진실은 그냥 묶어 놓아도 그대로 풀어 놓아도 진실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일반적으로 통용된 일체의 모든 사물은 물론 보이지 않는 모든 우리 인간들의 일들을 보통의 눈높이, 통상의 상식에서 한번쯤은 비틀어 볼 필요가 있다.

비틂은 항상 제자리에서의 머뭄을 때로는 한발짝 또는 두발짝 전진이나 후퇴를 의미한다. 발전이나 도약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새롭고 신선한 변화가 생김은 확실하다.

비틂의 시작은 바로 그 순간 탄력이 시작이고 일상에서 새로운 살 맛을 나게하는 신선한 대변화의 약속이다. 그냥 지속적인 현상을 비틂으로서 때로는 두터운 허물을 벗게 되기도 하고 또 하나의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며 껍질을 벗으면서 몰랐던 새로운 또 하나의 自我를 발견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