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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오지연의 Dental In-n-Out

깍쟁이의 명예를 걸고 (자충수 일듯 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며) 엄선, 정련한 고충 사례 몇 가지. 금연치료차 대기실에서 두런두런 하던 커플이 급기야 큰 소리로 다툰다. 요컨대 남자는 여자에게 끌려 왔을 뿐, 금연의지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내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 남자에 이어, 이게 다 빨리 진료와 처방을 안 해 준 탓이라는 애꿎은 항의로 직원을 다그치던 여자도 홱 돌아 나가버린다. 한때는 담배피우는 남자의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거나 적어도 담배쯤은 우리 사랑에 아무 문제가 안 된다고 믿었을 지도 모를 여자였을 것이다. 남자 또한 여자의 사랑만 얻을 수 있다면 담배 따위 아무래도 좋았을 거고. 그러나(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역시 요점은 네가 좋았던 거지 내 삶이 싫은 건 아니었다는 것 쯤 되려나. 그 아수라장과 함께 또 전화통엔 불이 난다. 상악 제2 대구치를 발치하고 가신 아버지가 대략 15분마다 한 번 꼴로 전화를 하시는 중이다. 아직도 피가 난다, 거즈를 바꿀까, 그냥 처음에 물고 있던 그대로 있을까, 밥 먹고 약 먹을까, 약부터 먹을까… 몰라서가 아니다. 85세임에도 아직 활활 불타고 있는 완벽한 기능과 구조를 향한 간절한 열망 탓인 것이다. 입맛 짧은 것 까지 쏙 빼 닮았다고 엄마의 지청구가 드높은 왕 재수 부녀간이니 거울 보듯 그 마음이 느껴지고, 깨진 그 거울조각에 찔린 듯 맘이 아프다.

어둑해져가는 청계천을 내다보며 생각해 보건대 오늘은 보기 좋게 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팀이 이긴 날이 제일 좋은 거고, 진 날 이라도 두 번째로 좋은 날이라는 야구 우스갯소리가 말하듯 아예 게임이 없는 나쁜 날만큼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영국의 축구선수 앨런 스미스의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처럼, 잠시 투톱도 되어보고 더 훌륭해 질 날을 꿈꾸며 지기도 이기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지냈을 뿐인데 훗날 난데없이 머나먼 나라 인터넷 상에서 지나가버린 전성기의 대명사처럼 불려 지기도 하는 게 세상사인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다. 이긴 날도 그렇지 못한 날도 저녁엔 가급적 평온하고 따스하게 마무리하며 울고 웃던 나날들 모두 추억으로 아름답게 남기를 기도 할 수 있을 뿐.

리즈시절처럼 당사자도 어리둥절할 만한 단어로 인상파가 있다. 1874년 봄 한 달간, 파리 살롱 전에 출품했다 거절당한 10여명의 화가들이 파리 시내 한 아틀리에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발 빠른 한 비평가는 전시된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비꼬아 ‘인상파’전시회인가 보다고 썼다. 벽지보다도 못한 솜씨라며 비난받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분명히 ‘이긴 것은 아니었던’ 이 화가들의 모임이 나중에 미술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었는지는 주지하는 바 일 테지만, 최근 나의 인상파 상념은 뜻밖의 계기로 부쩍 더 오묘한 빛을 띠게 되었다.

좋은 기억도 추억이 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슬픔을 머금게 마련이다.

반면 안 좋은 추억도 세월의 길이만큼 아름다움을 덧입게 된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드럽게 솟아올랐다.

가수 장기하가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 모네 등의 인상파 그림을 보고 쓴 이 영국 여행기의 한 부분을 읽고 깜짝 놀랐다. 일면식도 없건만 왕 재수 부녀사이라도 되는 듯 마음속 어딘가를 소리 없이 관통하는 놀랍도록 흐릿한 이런 공감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Don’t look back in anger, if possible.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