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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LA 한인타운 폭동(I)

스펙트럼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죽을 고비를 넘겨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린시절 딸부잣집 셋째딸로 유복하게 평탄하게 살아온 나는 1986년도 결혼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나고 6년 동안 3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1992년 귀국을 했다.

다행히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는 나지 않지만 그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충격은 아직까지 나에게 “외상트라우마”로 나의 뇌 깊은 한곳에 남아 한번씩 나를 과거로 돌아가게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정말 기억하고 싶지않은 경험들… 그 3번의 죽을 고비 중 하나… LA 흑인폭동사건.

1992년 4월 29일 저녁.
졸업이 불과 두 달도 남지않은 터라, USC Dental Clinic은 clinical requirement를 채우려는 student doctor 환자들로 야간 진료는 늘 북적였다. 나 또한 여느때와 같이 Nursery에서 하루종일 있는 5살 아들을 데리고 와서 나의 진료 cubicle에 앉혀두고 야간진료를 한참 하는 중이었다. 늘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원내 스피커에서 “진료하던 모든 작업을 멈추고 병원을 떠나라”는 다급한 소리의 원내방송이 연겨푸 스피커로 통해 흘러 나왔다. “All Doctors!! Evacuate the hospital immediately!!! ” 어린이와 임산부는 집까지 police car로 에스코트 하여 데려다 준다고 병원 밖으로 빨리 나가고 곧 병원은 폐쇄한다는 아나운서 목소리가 끝나나자마자 총소리까지 스피커로 통하여 들려오자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직감했다.

USC 병원 2년 근무하는 동안 허위 신고로 인해, 진료하다가 중단하고 병원 밖으로 대피한적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어떤 미친 놈이 또 허위신고를 했구나”하고 진료를 당장 멈추지않고 느릿느릿 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 중에는 스트레스 받은 학생들이 거짓 신고를 하여, 병원 진료업무를 마비시킨다. 특히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허위신고를 하면 진료를 보다가 모든 작업을 멈추고 병원 밖으로 탈출해야 한다.

나가보면 수술복 입은 채로, rubber dam을 끼고 침을 질질 흘리는 환자, 마취하고 발치하다 중간에 거즈를 물고 피 흘리는 환자 등등 각양각색의 의사와 환자들이 병원 밖으로 쏟아져 나와 한 두시간을 대피하고, 경찰과 119 요원들은 수색견을 풀어 병원을 샅샅히 조사하고 나서 모든 일들이 Clear!! 되면 다시 들어가 정상 진료를 하곤 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애피소드에도 아무도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그 당시 나로서는 참으로 신기했다. 환자나 의사나 안전에 대한 시민의식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날 야간진료를 받던 나의 환자, 멕시칸 이민 2세 아저씨 Carlos, 몇달동안 고생하며 치료받던 틀니를 오늘 장착하는 날인데 웬 날벼락!! 일단 틀니를 끼고 담에 오겠다고 Dr. Kim은 빨리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서 밖으로 나오지말고 대피하라고 상황의 심각성을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진료 끝나고 clinical professor의 treatment procedure 확인을 받고, 싸인을 받고, 환자의 진료비 계산서 완불 영수증까지 제출해야 환자에게 틀니를 줄 수 있고, 나의 prosthontic partial denture point도 받을수 있는데, 교수님들은 진료 체크도 안하고 환자들을 병원밖으로 내보내고 있었고, 동료의사들도 소지품만 간단히 챙겨서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USC 병원을 떠나고 있었다. 나의 단짝 Dr. Tad는 빨리 병원을 떠나자고 손을 잡아 끌었지만, 나는 병원 지하 1층 locker에 있는 내 소지품들은 챙기겠다고 우기자, 기가 막힌듯이 “Dr. Kim! This situation is not Emergency!! This is actual WAR !!.
We do not need USC dental school graduation certificate !! I will keep your son”

Dr. Tad는 5살 나의 아들 Edward을 데리고 밖으로 먼저 뛰쳐나갔다. 원내 스피커에서는 라디오 중계방송을 계속 틀어놓고 있는데 총소리와 현장 중계방송하는 아나운서의 급박한 빠른 영어는 제대로 다 알아들을 수가 없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대충 파악이 되었다.

흑인 피의자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에 의해 과잉진압을 당했고, 과잉진압을 한 백인경찰들은 무죄판결을 받게 되자 LA흑인들이 폭발하여 폭동을 일으킨 “로드니 킹”사건.


병원 밖을 나가니 Dr. Tad가 미리 준비해둔 police 에스코트 차를 타고 USC병원 건너편에 있는 학교기숙사로 안전하게 이송되고, 타자마자 백인경찰관은 차분하게 흑인폭동을 설명해주며, 집안의 불은 다 끄고, 커튼을 치고, 불빛과 인기척이 밖으로 새어나오지않게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사태를 보고 하루 이틀 사이에 LA 시내를 탈출해야 한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LA한인방송 Radio Korea를 숨죽이며 듣고나서야 모든 상황이 파악이 되었다. 흑인폭동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되는 아들은 답답하다고 보채기만 하고, 이틀동안 먹을 양식도 물도 없고, 옆집 기숙사 아이들 둘은 울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아이를 때리는 소리도 들린다. 라디오코리아 방송에서는 southern LA에서 시작된 흑인 폭도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며, USC 병원 인근 주유소 몇 개는 불타고 있고, 한인타운 쪽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한다. 흑인들은 단순 백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LA 한인슈퍼마켓의 주인이 돈을 내지않고 저항하는 흑인 청소년에게 총격까지 가한 사건이 얼마전에 있었는데, 이에 흑인들은 LA한인사회에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흑인 시위자들은 최종 목적지를 비벌리힐즈의 갑부들과 연예인 주거지로 잡고 진격을 시작했는데, 그 경로에 코리아 타운이 있었고, 흑인들은 첫 번째로 코리안 타운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한인들은 마트 장사를 하며 어렵게 살고있었는데 흑인들의 공격에 마트들이 부서지고 물건들이 어이없이 털리게 되었다. 당시 LA당국은 6000명 방위군을 긴급 투입을 했는데 비버리힐즈와 다른 백인거주지만 방어를 하고 정작 약탈이 가장 심한 한인타운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불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에 한인들은 해병대 전우회를 중심으로 자체 방위대를 소집하여 한인타운을 지키려고 총으로 무장을 하고 각지에 흩어져 살던 한인들이 속속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한인 타운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방송을 들으며 나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이유없이 타국에서 약탈 당하고 죽어가는 우리 동포들을 생각하니 이 미국이라는 나라가 너무나 싫어졌다. 6년 미국유학을 하고 있었고, 10년 유학을 채우겠노라고 결심했던 나는 당장이라도 미국을 떠나고 싶었다. 한국 부모님들은 빨리 귀국하라고 전화가 빗발치고, 대학교수 발령을 받아 한국에 일년 먼저 들어간 남편도 졸업장이고 면허증이고 다 버리고 아들 데리고 당장 들어오라고 독촉을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LA 방위군들은 백인거주지역에 들어오면 흑인이던 한인이던 실탄을 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우리 한인들은 속속들이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라디오 코리아 방송은 연 이틀 쉼없이 현장 중계방송으로 한인들의 단결을 외치며 울부짖는 한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This is real WAR !! to be continued.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미애  K치과병원 대표원장